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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 해결된다 (03-26-2023)

 

날씨가 풀리니 여러 모로 좋습니다. 무엇보다 겨우내 추위 때문에 꺼려졌던 산보를 하니 좋습니다. 교회 주변의 길을 따라 가다보면 산 속으로 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봄 햇살을 맞으며 눈을 감고 걷노라면 새 소리들이 유난히 크게 들립니다. 다양한 종류의 새소리인데 모두들 봄이 와서 신났다고 재잘거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걸으면 해결된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로제 폴 드루아라는 사람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걷기를 통한 사색의 힘에 있었다.”라고 말하며 걷기가 인간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말했습니다. 참으로 그렇다는 생각을 걸으면서 많이 합니다. 걸을 때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걷기를 통해 많은 유익을 얻어오고 있습니다. 특히 걷기와 기도의 상관 관계는 매우 깊어 보입니다. 제가 가장 선호하는 기도 방법, 그러니까 하나님과 대화하는 방법은 걸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산 속이나 숲속 아니면 잔디밭을 걸을 때 하나님과 깊이 접속하게 됩니다. 얼마 전 3월 17일이 자신의 성일이었던 아일랜드의 성자, 성 페트릭(St. Patrick)은 숲을 무척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주기적으로 숲을 방문하여 며칠이고 그 안에 머물다 오곤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성 페트릭을 상징하는 색깔이 초록색이 되었다고 하죠. 성 페트릭을 존경하는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새깔도 초록색이 되었구요. 숲 속을 걸으며 회복하고 충만해지는 것은 단지 저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걷기와 영성형성’에 관한 것입니다. 걷는 것이 우리 영성을 얼마나 풍성하게 해주는 것인지 해 본 사람은 이해할 겁니다.


오늘 걸으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걷고 있다는 것은 내가 주저앉지 않다는 것이겠구나.” 주저앉거나 좌절한 사람은 걸을 수 없습니다. 서 있다는 것, 걷고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고 희망 가운데 있다는 증거일 겁니다. LA에 있는 Getty Center라는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Giacometti의 “Standing Woman”이라는 조소 작품을 감상한 적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Walking Man”을 만들기 몇 년전 그는 서 있는 여인을 먼저 만듭니다. 중국에서 추방당한 지 몇 달이 안 되었고 어떨결에 미국까지 흘러온 상태에 있던 제게 서 있는 여인의 상은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서 있어보이지만 그는 주저 앉아 있진 않았습니다. 걸을 준비를 하며 재기를 노린거겠죠. 직립, 그것은 사명을 달려가기전 숨고르기 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부활(復活)이라는 헤라어’아나스타시스’와 라틴어’resurrection’ 모두 ‘다시 일어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은 다른 게 아니라 주저 앉았던 그 자리를 털고 일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만물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이 봄에 주님의 부활을 맞이한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다시 일어나 걸으시겠어요? 걸으면 해결될 겁니다.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며 함께 걸으시는 주님 계시니 다시 일어나 걸어요.

불편한 편의점 (03-19-2023)

 

노회참석차 시카고 오고가는 하늘 길에서 “불편한 편의점”이라는 소설 1권과 2권을 읽었습니다. 제목부터 편의점이 편의를 주지 못하고 불편을 주다니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소설은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에 위치한 작은 편의점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염영숙은 동네교회에 출석하고 있고, 70대 초반에 역사선생님으로 은퇴한 노파입니다. 몇 년 전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영숙은 Always라는 편의점을 경영해 오고 있습니다. 적자로 운영난을 겪으면서도 그녀가 편의점을 접지 못한 이유는 편의점 알바를 하며 재기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작은 배려였고, 애당초 그녀는 그런 목적으로 편의점을 시작했던 겁니다. 영숙은 부산으로 가던 기차 안에서 자신의 지갑이 든 파우치를 분실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한 통의 전화를 받는데 자신의 파우치를 서울역에서 습득한 사람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습니다. 그는 서울역을 근거로 힘겹게 살아가는 노숙자였고, 영숙은 그를 자신의 편의점까지 데리고가 편의점 도시락으로 그의 허기를 달래줍니다. 이렇게 시작된 영숙과 독고라는 50대 초반의 또 다른 주인공을 통해 소설은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독고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알코올 중독에 의해 기억을 잃어버리고 오랜 노숙자 생활에 말을 더듬기까지 했으니 사람들이 그를 부담스러워하고 불편해 하는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야간 알바를 하는 편의점 또한 불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서울 중심부이지만 개발되지 않은 청파동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편의점을 통해 독고라는 남자와 연결이 되고, 독고는 그의 외모와 딴판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소설은 독고를 통해 갱생되고 제기하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로 채워지고, 결국 독고는 잃어버렸던 자신의 삶을 되찾는다는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영숙씨의 작은 호의와 신뢰가 어떻게 나비효과가 되어 많은 이들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지 이 소설에서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독고는 불편한 편의점에 기대어 추위를 피하고 폐기 상품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이었지만 그는 영숙에게 받은 호의와 신뢰를 편의점에 방문하는 고객들에게 그대로 흘러보내 줍니다. 편의점을 이용하는 청파동의 가난한 인생들은 독고의 친절과 조언을 통해 그들 또한 재기를 꿈꾸고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소설을 읽으며 교회가 이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여러 모로 부족하고 불편한 것들도 많지만, 교회는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이 와서 쉼을 누리는 곳이어야 합니다. 서로의 친절과 호의를 통해 격려 받고 살아갈 용기를 얻어야 하는 곳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삶에 베풀어주신 그 크신 은총과 자비를 경험한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베푸는 호의와 자비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꿔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베라는 남자 (03-12-2023)

 

사회성이 없다고 평가 받는 한 노인이 있다. 그는 사브만 타왔고 볼보나 독일차를 타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는 흑백으로 이뤄진 남자다. 그의 아내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그가 가진 색깔의 전부였다. 그는 숫자를 좋아했고 수학만 좋아했다. 그의 어머니는 화학공장에서 일한 것이 원인이었는지 그가 여덟 살 즘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말이 없는 분이셨는데 그의 어머니가 그나마 남아 있는 아버지의 단어들을 가져가 버렸는지 말이 더욱 없어졌다. 그가 고등학생일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이 흑백일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는 무뚝뚝했다. 어느날 기차를 기다리며 만난 그녀는 그의 삶에 큰 위로였다. 이 남자는 40년 동안 그의 삶을 채색했던 아내가 죽자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삶에 짓궂은 이웃들이 끼어들며 그의 계획은 엉망이 되어 간다. 전혀 계획이 없이 이웃들과 엮이면서 그의 삶은 또 다른 색깔로 채워진다. 무뚝뚝하고 인간미가 전혀 없어 보이는 따뜻한 그 남자는 오베라는 남자이다. 


지난 주에 <오베라는 남자>라는 스웨덴 작가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큰 감동과 눈물을 준 책은 참 오랜만입니다. 먼저 항상 외국 소설을 읽을 때 저의 흥미를 끄는 점은 그들도 우리 사는 것과 똑같다는 생각입니다. 미네소타의 이주민 중에 스웨덴 같은 북유럽인들이 많다보니 더 흥미를 갖고 봤는데 한국 사람들의 희노애락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이웃에 사는 코카시안들도 내가 갖는 기쁨과 절망, 환희, 슬픔 등의 감정 가운데 살아가고 있겠구나라는 이해가 훨씬 깊어진 듯합니다. 두번째 이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웃’과 ‘로컬’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이웃을 주셨고 그 이웃들이 우리 삶에 어떤 환희와 기쁨을 선물해 줄 수 있는지 우리는 망각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아니 애써 ‘이웃’을 우리 사전에서 지우려하고 ‘골칫덩어리’로 고쳐 읽으려는 경향까지 있습니다. 곁가지일 수 있지만 저와 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두리안’입니다. 두리안은 겉에 딱딱한 갑옷이 쌓여 있는 과일입니다. 갑옷에다 가시까지 겉면을 싸고 있어서 여간 부담스러운 겉모양이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그 겉면을 벗기면 우리를 더욱 당혹스럽게하는 사차원의 향기는 이 과일을 더욱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그 과육을 맛 본 사람은 그 과일의 진가를 압니다. 오베라는 남자가 딱 두리안같은 이웃이었습니다. 그의 이웃들에게 딱딱하고 가시 돋은 말을 하는 그였지만 그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웃들은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와 어울리기를 기뻐합니다. 우리네 삶에도 이런 이웃 사랑의 기쁨이 회복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두리안 처럼 부담스럽고 다가가기 힘든 존재가 이웃이지만, 그들은 무미건조한 우리 삶에 색과 맛을 줄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네에도 또 다른 오베가 있을테니까요.

주님을 먹다 (03-05-2023)

 

‘생명의 양식’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라틴 말로 불려진 노래인데 Panis Angelicus라는 제목입니다. 안드레아 보첼리가 부른 곡을 자주 듣곤하는데 매우 은혜스러운 찬양입니다. 신대원 시절에 라틴어를 배울 때 심심풀이로 번역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이 원곡과 상당히 다르게 오역된 것 같아 시작한 건데 그 의미가 너무 놀라웠습니다. 


Panis angelicus, fit panis hominum

천사들의 빵이 사람들의 빵이 되었다.

Dat panis coelicus figuris terminum 

하늘의 양식이 형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끝을 보여주셨네.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으로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표현입니다.)

O res mirabilis, manducat dominum 

오~ 신비로운 일이여, 주님을 먹는구나

Pauper, pauper, servus et humilis

Pauper, pauper, servus et humilis 

가난하고, 가난하고, 비천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가난하고, 비천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주님을 먹는구나)


제가 이 노래에서 가장 감동이 되는 부분은 ‘주님을 먹는구나(manducat dominum)’입니다. 기독교와 이방 종교의 가장 큰 차이는 성만찬에 있습니다. 성찬 또는 성만찬은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을 만든 신(神)을 감히 먹는 독특한 종교 예식입니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에게 먹힘을 당합니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인 인간이 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이 땅에 보냅니다. 그는 육신을 입고 자신의 살을 찢고 피를 쏟아 사랑의 끝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을 먹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성찬을 행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을 감히 먹습니다. 그 놀라운 자기 내어줌과 희생을 우리 몸과 영혼에 흡수하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는 이 예식을 통해 그분의 희생과 사랑을 기념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예수님의 그런 태도와 자세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는 것이죠. 오늘도 우린 주님을 먹습니다.

사순절 (02-26-2023)

 

우리는 시간의 순환 속에서 살아갑니다. 모든 시간은 중립적이지만 어떤 시간들에 대해서 우리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예를 들어 생일은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시간에 불과하지만 생일을 맞는 이에게는 1년에 한 번 주기적으로 찾아 오는 특별한 시간이기에 그날을 기념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제 7일째의 시간을 거룩한 시간으로 특별한 의미를 두셨습니다. 그날을 안식일로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시면서 다른 엿 새보다 더 큰 무게를 갖게 하신 겁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의 시작을 해질녘으로 이해했고 금요일 저녁부터 그 다음날 토요일 저녁까지를 안식일로 거룩하게 지켜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또한 1년의 순환 속에서 중요한 절기들을 정하여 기념하였습니다. 각각의 절기들에는 절기를 기념하는 활동과 음식들을 통해 그 절기의 의미들을 되새기게 됩니다. 절기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해 주는 중요한 의례이기 때문이었죠.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칠칠절), 초막절(장막절) 입니다. 


특별히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왜냐면 그들 민족의 역사에서 출애굽(Exodus)이 차지하는 의미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보금자리가 없이 방황하며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은 약속의 땅으로의 탈출을 위한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계획을 경험하게 됩니다.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전환되는 의미있는 역사적인 경험이었기 때문에 유월절은 자자손손 이어지게 될 중요한 절기로 자리잡았죠. 특히 유월절이라는 의미를 가져다 준 어린양의 피와 희생은 이절기에서 중요하게 기억되어야할 내용이 되었죠. 


이 유월절은 신약시대로 넘어오면서 부활절로 새롭게 거듭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의미있게 지키기 위해 유월절 전에 금식하며 경건하게 유월절을 준비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전통을 계승하여 부활절 전 40일간의 시간을 부활을 준비하는 절기로 지키게 되었죠. 40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숫자였습니다.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그들은 광야 생활을 했고,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시작하시면서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40일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40일의 영혼의 갱생의 시간을 통과한 사람들이 맞는 부활절은 감격스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없이 부활은 없다.”라는 중요한 명제의 실천을 위해 사순절이 행해진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은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묵상하고 따르며 나를 온전히 십자가에 못박는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과 함께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은 사람만이 부활의 큰 감격을 맛볼 수 있기 때문에 사순절은 큰 의미를 갖는 절기가 되었습니다.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통해 탐욕과 욕망으로 가득한 우리 자아를 온전히 비움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살아내는 기쁨을 맛보기를 소망해 봅니다. 사순절을 통해 예수 따름이로서 우리 정체성을 확인하길 원합니다.

어느 발렌타인데이에 (02-19-2023)

 

 

지난 화요일은 발렌타인데이(Valentine Day)였습니다. 어린 시절 발렌타인데이는 남자가 여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로 이해했습니다. 그 시절 발렌타인데이와 졸업식이 겹치는 날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이나 선배들에게 졸업선물하기 부담스러우면 초콜릿 하나로 퉁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200원짜리 가나 초콜릿 하나의 그 달콤함은 지금도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졸업식날이면 동네 짜장면집마다 자리가 가득 매워져 자리 잡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졸업식날에 왜 짜장면을 먹는 풍습이 생긴 걸까요? 그러고 보면 졸업식에 짜장면, 발렌타인 데이에는 초콜릿이라는 의례와 관습을 통해 우리는 그렇게 우리네 인생을 즐기고 있었나 봅니다. 


결혼하고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내에게 꼬박 꼬박 발렌타인 선물과 꽃을 선물하곤 했는데 아이들 태어나고 생략하기로 했죠. 1년 365일이 발렌타인 데이가 되게 해줄게 라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그렇게 퉁치고 넘어간 것이었습니다. 각주로 소비주의 상술에 넘어가면 안된다는 말을 덧붙이고는 그렇게 마음 편하게 발렌타인 데이를 부담 없이 넘기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작은 장미 한 다발이라도 아내에게 주고픈 마음이 생기더라구요. 손편지 한 통과 장미 몇 송이 밖에 안되는 작은 다발을 아내에게 전달했습니다. 편지를 쓰고 꽃을 사며 낭만을 잃어버린 지난 시간을 후회했습니다. 편지 한 통 쓰고 꽃 한송이 전해주고 포옹 한 번 해주는 것이 별 거라고 그렇게 인색하게 살아 온 것이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절기는 특별하게 지키며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다시 갖게 되었습니다.


사순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발렌타인과 초콜릿 쌍처럼 사순절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으신가요? 저에게는 사순절과 봄이 쌍으로 연상이 됩니다. 사순절의 낭만이라고 할까요? 사순절은 결코 낭만과 거리가 먼 절기이지만 사순절 기간에 마주하곤 했던 봄기운이 너무 반가워 사순절은 항상 봄과 연결되곤 했습니다. 사순절은 온갖 생명체들이 잠시 자기를 죽이고 움츠려 있는 듯한 겨울처럼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겸손히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주님의 부활과 함께 소생을 꿈꾸는 기간이죠. 혹독한 겨울의 시련이 크고 깊을수록 봄을 맞는 기쁨은 배가 되듯, 고난의 의미와 실제가 나에게 깊이 다가올수록 부활의 기쁨은 커지는 것입니다. 사순절이 별건가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정을 확인하는 발렌타인 데이처럼 사순절은 우리의 신랑 되신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회복하고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더 크게 맛보기 위해 절제하고 성찰하고 묵상하고 기다리면서 뜻깊은 사순절을 보냈으면 합니다. 잃어버렸던 주님을 향한 우리의 낭만이 이 사순절에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주님의 이름과 예배 (02-12-2023)

 

예배를 드리는 것 그리고 그 예배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에 그분은 우리와 사귐을 원하십니다. 예배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사귐과 교제라 할 수 있습니다. 사귐의 예배는 항상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오심으로 시작됩니다. 예배를 통해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 중심에 모시고 소원해졌던 그분과의 관계를 다시 돈독하게 합니다. 모든 사귐과 교제에는 상대가 누군지에 대한 인식이 전제됩니다.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를 위한 필수적인 행위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 그는 우리에게로 와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로 나아가며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누군가를 높이고 찾을 때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며 아담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셨듯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전 주님이 먼저 우리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성소로서 에덴동산의 제사장이었던 아담은 하나님을 찾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자신을 경배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대체자로서 아브람을 지명하실 때 그에게 성전은 유동적이었습니다. 그는 옮겨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창세기 12장 8절에서는 “아브람은 거기에서도 제단을 쌓아서, 주님(야웨)께 바치고, 주님(야웨)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라며 아브람의 예배 행위를 묘사합니다. 아브람의 예배 행위에 있어 중심이 되는 것은 제단을 쌓은 것과 야웨의 이름을 부르는 두 가지입니다.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특정한 장소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뜻이겠죠. 야웨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그에게 약속을 주기로 하신 분을 기억하여 소환했다는 뜻일 겁니다. 그와 맺은 언약관계에 서명을 한 당사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찾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대항적인 신앙의 결단입니다. 다른 신을 따르지 않고 야웨만을 따르겠다는 신앙적 결단인 것이죠.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이가 어떤 인격인지를 나타내주는 상징입니다. 야웨라는 이름 안에 하나님의 인격이 담겨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야웨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열정적인 찬미일 뿐 아니라 간구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의 신앙을 조율하는 행위입니다. 내가 잘못 경배 드렸던 대상을 수정하고 나의 경배 대상은 오로지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신앙의 조율 행위인 것이죠.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의 엉클어지고 혼란스런 삶을 향한 그분의 개입을 촉구하는 행위입니다. 오늘의 예배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을 찬미하고 높입니다. 예배는 분위기를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의 대상을 향한 찬미를 드리며, 우리 삶을 향한 그분의 개입을 바라며 기도합니다. 우리의 찬미와 간구와 삶을 받을 대상이 누군지에 대한 명확한 좌표 설정과 조율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행위가 갖는 의미입니다. 

거룩한 식사 (02-05-2023)

 

예배가 갖는 의미는 다양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사건을 재현하여 기념하는 것으로서의 의미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오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큰 구원의 사건은 출애굽이었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편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오신 구원행위였죠. 예배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건에 대한 재현이자 증거이며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항상 인간보다 먼저 예배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다가오시며 은총의 도구들을 통해 자기를 나타내실 때 인간은 그것에 반응하여 하나님을 높이고 기념하는 것이 예배인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간의 순환 가운데 어떤 시간들을 거룩하게 지킴으로 그들의 조상들 가운데 행하셨던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들을 기념하곤 했습니다. 유월절, 초막절, 칠칠절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삼대 절기인데 모두 그들의 조상들 가운데 행하셨던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들은 이런 절기에 성례전적 행동과 행위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삶 가운데 재현하고 실행했습니다. 예를들어 유월절에는 쓴나물과 누룩이 없는 빵을 먹으며 식사를 했고, 장막절에는 텐트를 치고 생활하면서 조상들의 광야 생활을 재현하기도 했죠. 이스라엘의 예배 의식에서 식사가 차지하는 역할은 상당했습니다. 특히 제사중에 화목제사는 공동체가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도록 고안된 특별한 제사였습니다. 감사와 서원의 제목을 가진 사람이 드린 가축 제물의 먹지 못하는 장기들을 태우고 남은 고기를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나누어 먹는 제사 방식이 화목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이 바로 화목제물로 드려진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오늘의 예배에도 이런 구원 행위들에 대한 기념은 여러 성례전적인 예식들을 통해 재현되고 있습니다. 성만찬이 그 대표적인 예이죠. 성만찬은 화목제물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재현하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식사를 통해 예수님의 희생을 기념하고 성도간의 화목한 교제를 추구합니다. 1세기 교회 성도들의 예배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고 교회됨을 확인하는 데 있어 식사가 차지하는 부분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집에서 가장 공적인 공간이었던 식당이나 아트리움(뜰)에서 모였고 모일 때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빵과 포도주의 나눔을 통해 기념하였죠. 식탁교제야말로 기독교 예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랬고 초기교회 성도들이 그랬듯이 우리는 거룩한 식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을 재현하며 기념하게 됩니다. 거룩한 식사(성만찬)는 우리의 믿음 생활의 귀한 양식임에 틀림없습니다.

겨울 나무 (01-29-2023)

     

겨울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해가 점점 길어져 감을 보며 이 겨울 의 끝을 상상하게 됩니다. 다음 주에 예고 된 한파도 견디다 보면 지나가겠 죠. 또 한파가 여러 번 오겠지만 그것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삭풍에 움츠 려 들면서도 봄을 상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창너머 겨울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하는데 그럴 땐 어김 없이 어린 시절 좋아했던 ‘겨울나무’라는 동요가 떠오릅니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 는 추운 겨울에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겨울나무는 자기가 자리 잡은 그곳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긴 겨울을 그냥 버티고 있는 것이겠죠? 바람이 불어 닥치면 그 바람으로 오히려 휘파람을 불어가는 여유를 부리며 그렇게 버티고 있는 것이겠죠? 겨울나무가 바람 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여러분도 잘 버티고 잘 견디라고 응원하는 것 같 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긴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에게 에너지를 만 들어 주던 파란 이파리들을 다 떨궈내고 그렇게 겸손하게 인생을 버텨가 는 겨울나무를 바라보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긴긴 겨울을 보내고 나면 나 무에게는 상급처럼 딱딱하고 진한 나이테가 주어지겠죠. 그 혹한에도 나 무는 자라고 있었다는 증거이자 보상일 겁니다. 인생의 혹한기를 지나고 계시는 형제 자매님들이 계실텐데 겨울나무처 럼 잘 버텨내시길 기도드립니다. 도망가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서 버티 다 보면 봄날은 찾아올 것입니다. 지금은 납작 엎드려 겸허히 기다려야 하 는 시간일지 모릅니다. 이 기나긴 겨울이 끝이 없어 보이지만 변하지 않 는 사실은 봄이 저만치 멀리서라도 오고 있다는 겁니다. 따뜻한 봄을 상상 할 수 있는 자격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끝이 있다는 것, 그것은 큰 희망입 니다.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순환을 보며 우리는 창조주의 신비를 경험하 곤 합니다. 계절의 변화를 통해 창조주를 만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모든 시즌에는 그 시즌 마다 매력이 있습니다. 시인이자 가수인 라드 맥쿠언은 계절의 변화와 그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했죠.“And to each season something is special Lilac, red rose or the white willow. Young men of fortune old men forgotten Green buds renewing The brown leaves dead and gone…”우리 모두가 다른 계절을 지나고 있고 다른 형편이지만 각자에게 가장 최 선의 시즌을 보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음을 믿고 나아갔으 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삭풍에 흔들리는 모든 겨울나무들이여 잘 버티 시고 이겨내십시오. 마음을 담아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언어와 정체성 (01-22-2023)

     

지난 주에 옆교회에서 주일마다 모이는 중국인 교회 리더를 만났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설날인데 중국교회는 어떻게 보내는지 물어보 았습니다. 금요일에 모여서 꿔니엔(過年)을 한다고 그러더군요. 중국인들 은 새해 첫날보다 그 전날 저녁에 모여서 한 해를 보내는 데에 더 큰 의미 를 두죠. 그래서 ‘한 해를 보낸다’는 표현으로 새해를 맞습니다. 우리는 새 해 아침에 서로 문안하며 한 해를 축복하는 것이 그들의 문화와 조금은 다 르죠. 중국인들은 세계 어디서든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하고 언어를 지키 기 위해 노력하는 민족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중국인들보다 더 치열하게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를 지키고자 노력했던 민족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받아들였습 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딜 가든 회당을 결성하여 안식일마다 모이기를 힘 썼죠. 회당의 가장 큰 기능은 다름 아닌 교육 기관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역 만리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들의 말을 사용하며 살아가지만 회당에서 만 큼은 히브리말로 말씀을 듣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히브리말을 노출시켰습 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정체성은 몇 세대가 지나면 온데 간데 없 이 사라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이 이국의 언어에 익숙하고 히브리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히브리어 교육을 고수한 것이죠. 안식일마다 히브리 성경을 들려주고 히브리식 교육을 시켰습니다. 저에게 가끔 이민 교회 교육에 대해 질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땅에서 이민자로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민족이라 는 정체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한인교회로 모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교육도 한인교회 안에서는 한국어 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물론 영어가 편하고 영어가 모국어인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언어는 정체성이자 정신을 담는 그릇임을 믿습니다. LA에 있을 때 많은 이민 2세 3세의 Korean American들을 만났었습니다. 그들의 세대에 부모님은 영어만 강요했고 한 국말을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중에 미국인들의 커뮤니 티에도 한인들의 커뮤니티에도 들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정체성의 혼란과 방황이 그들에게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인후예들에게서 한국어 를 거세해 버린 댓가는 너무나 컸습니다. 반면에 뉴질랜드나 호주같은 이 민 교회에서는 대부분의 교회가 한국어로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좀 불편하더라도 한인교회 안에서는 한국어 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이민 생활이 훨씬 장구 하신 분들 앞에서 모르는 소리일 지 모르나 저는 역사를 되새겨 봐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과 중국인들의 역사가 말해주는것은 언어와 정체 성은 우리 삶을 지탱하고 유지하게 해주는 핵심가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소포 (01-15-2023)

     

추운 겨울이 되면 군대시절이 가끔 생각납니다.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하 던 저는 영하 20도를 넘는 추위를 난생 처음 경험해 보았습니다. 추우면서 도 고립된 생활을 하는 군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사회와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었죠. 어떤 이들은 공중전화통을 붙들고 외로움을 달랬고 어 떤 이는 지인들을 부대로 불러 외박, 면회 등의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하기 도 했죠. 그 시절 저는 편지를 참 많이 썼습니다. 편지를 쓰는 즐거움보다 편지를 받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이병 편지왔다.” 고 참이 건내주는 편지 한 통에 모든 피로가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고 마음 써주고 있다는 것을 편지로나마 느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편지도 편지지만 소포보다 더 큰 기쁨은 없었습니다. 종이 상자 가득 과자를 담아 보내 준 친구의 마음이 따뜻하기만 했습니다. 물론 열자 마자 고참들에게 뺏기고 내무반 전우들과 함께 순식간에 먹고 없어지지 만 소포의 여운은 꾀 오래 갔었습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소포를 통 해 그렇게 연결되는 기쁨을 누렸던 것 같습니다. 한 번은 동아리 선배들과 친구들이 카세트 테이프에 노래도 녹음하고 시도 녹음하고 돌아가며 저에 게 한 마디씩 전하는 메시지를 담은 녹음한 테이프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 다. 테이프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번 주 군대 시절에 느꼈던 그 소포의 추억과 희열을 오랜만에 느껴보았 습니다. 월요일에 갑자기 울타리 몰에서 전화가 왔더군요. 저는 울타리몰 에 가입한 적도 없고 물건을 시켜 본 적도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실은 군대 시절에 함께 성가대 봉사를 하던 옆집 중대 아저씨가 LA에 이 민 온 지 20년이 넘어가는데, 형님이라고 부르는 그 분이 저에게 전화를 준 것이었습니다. 지금 울타리몰 사장님이 옆에 계시는데 아는 사람 중에 울 타리 몰 먹거리를 주고 싶은 사람 있냐고 하시면서 당장 전화 걸어 주소를 물어 보라 하셨다고 합니다. 다음 날 배송 온 선물꾸러미를 받아들고 항공 익일 배송의 속도에 대한 경탄과 함께 감동이밀려왔습니다. 이건 사회의 어떤 분과의 연결을 넘어 저 하늘 위에 계신 크신 어떤 분과 연결되는 그 런 기쁨이었습니다. 당장 울타리몰 신사장님께 손편지를 보내 그분의 호 의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군대시절 성가대의 인연이 울타리 몰까지 연결 되는 플로우를 보며 인생의 신비와 해학을 경험했습니다. 지금 여기서도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호의들이 또 다른 호의 를 만들어 이 세상이 더 아름답고 따뜻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포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바람도 생깁니다. 이웃 사랑 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상대의 존귀함을 꽃피워주고 깨닫게 하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작은 소포처럼 말입니다. 

디지털에 갇힌 진리 (01-08-2023)

     

제가 이해하는 구약 성경의 한 줄 요약은 “출애굽에 실패한 이스라엘”입 니다. 출애굽(Exodus)이란 애굽, 즉 이집트(Egypt)를 탈출한다는 일차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나가다’는 뜻의 ‘ex’와 ‘길’이라는 뜻의 ‘hodus’가 합쳐진 말입니다. 길이란 삶의 방식을 의미하죠. 출애굽의 2차적 인뜻,그러니까속뜻은기존의삶의방식에서벗어나새로운삶의방식으 로 들어가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파라오의 체제에서 순응하며 살던 방식 을 박차고 나와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는 결단이지요. 이 스라엘은 몸의 탈출과 함께 정신의 탈출을 이뤄내야 했는데 실패했습니 다. 몸의 탈출은 이집트를 벗어나는 것이었겠죠. 정신의 탈출은 파라오의 가치간과 세계관과 문화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히브리인들 은 몸은 이집트를 나왔지만 정신과 가치관과 문화는 이집트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시대에 출애굽을 살아가는 것이라 이해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출애굽적인 삶은 성경적인 가치관과 세계관, 그 리고 문화를 장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세계관과 가치를 과 감히 버리고 대안(代案)적이고 대항(對抗)적인 성경의 가치관을 갖는 것이 야말로진정한출애굽이라할수있습니다.기독교인들은어느시대나그 시대의 주류 문화와 지배세력들에 대항하는 가치관을 추구하며 살아왔습 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가나안의 문화, 그 후손들 세대에는 이집트, 앗시 리아, 바빌론, 헬라, 로마라는 주류 문화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오늘 날의 주류 문화는 무엇일까요?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자본주의 (capitalism)라 생각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돈이고 다른 말로 이윤의 창출입니다. 자본주의는 이를 위해 효율성이라는 중요 한 가치 판단을 기준으로 활용합니다. 나아가 효율성을 표현하기 위해 숫 자, 다른 말로 샘을 사용합니다. 재독(在獨)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책 ‘투명 사회’에서 디지털사회의 탈역사성과 탈서사성에 대해 비판합니다. 디지털 은 숫자를 새기 위한 ‘손가락’이란 뜻의 라틴어 ‘digitus’에서 유래합니다. 우정, 사랑, 관계와 같은 가치들은 원래 이야기이며 서사적(narrative)인데 디지털 사회는 이런 가치들을 숫자로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페이스북 이나 인스타 같은 곳에서 친구도 애정도 호감도 모두 숫자로 표현됩니다. 모든것이셀수있게가공되어버리죠.디지털사회에서서사적인것은급 격히 의미를 상실해 버립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야기입니다. 출애굽도 이 야기이죠. 교회의 건강성을 숫자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이야기 여야 합니다. 진리를 숫자에 가둘 수는 없잖습니까? 교회는 지금 진리를 따라가기 위해 이 숫자와 싸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01-01-2023)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습니다(상선약수-上善若水). 첫째, 만물을 이롭 게 하기 때문입니다(선리만물-善利萬物). 둘째,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 에 자신을 두기 때문입니다(처중인지소학-處衆人之所惡). 셋째, 다투지 않 기 때문입니다(부유부쟁-夫唯不爭). 산이 가로막으면 돌아가고 분지를 만 나면 그 빈곳을 가득 채우고 돌아갑니다. 마음을 비우고(심선연-心善淵) 때가 무르익어야 움직입니다(동선시-動善時). 결코 무리하는 법이 없기 때 문에 허물이 없습니다(고무우-故無尤). 그렇기 때문에 물은 도(道-진리)에 가깝습니다(고기어도-故幾於道).
-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제 8장 중에서 (신영복, 처음처럼, 28쪽) - 


물은진리가갖고있는특징을많이갖고있습니다.자연안에서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던 노자(老子)는 그래서 물은 최고의 선을 닮았다, 즉 진리를 무척이나 닮았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물은 진리이신 주님을 무 척이나 닮았습니다. 주 예수께서는 만물을 이롭게 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이 세상 속으로 친히 내려오셨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십자가를 지시고 만인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그의 자리를 두셨습니다. 사 랑이신 그분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주님께서는 물처럼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셨죠. 

새해가밝았습니다.올한해우리의삶이물과같은삶이었으면좋겠습 니다. 물처럼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갔으면 좋겠습니다. 상처 받고 깨진 마음 을가진사람들을감싸안으며머물러주는물과같은여유가우리에게있 으면좋겠습니다.빈곳을가득매우며공허하고허탈해하는이들의마음 을 부요하게 해주는 그런 한 해의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리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며 때를 분별하고 움직일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우 리에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올해 우리 모두의 삶이 “물댄 동산”처럼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이 었으면좋겠습니다. “주님께서너를늘인도하시고,메마른곳에서도너 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이사야 58장11 절).” 광야와 같은 나그네 인생을 사는 우리지만 물이 끊어지지 않는 삶이 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벽두 겸손하게 기도해 봅니다. 주님 물과 같은 삶 을살게하소서.새해에는주님을더닮게하소서.신의성품에참여하는 구별된삶이되게하소서.더겸손하게하시고더낮아져많은이들의삶 을품어주고감싸안아주는바다와같이넓은인생되게하소서.바다가 백개의내(川)를받아들여크게된것은,세상에가장낮은곳에있기때문 이라는것을마음에새기고더겸손한한해의삶이되게하소서.  


함께 라면 (12-25-2022)

 

지난 주 설교를 통해 “함께 가면 험한 길도 즐겁다”라는 말씀을 나눴었죠. 설교를 한 지 딱 닷 새가 지나고 교회 카톡방은 모 형제님 가족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동행에 뜨겁게 달궈졌습니다. 하필 한국 방문 기간에 형제님의 난방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면서 그 댁의 동파를 막기 위해 다들 발 벗고 나서준 아름다운 일이 벌어졌죠. 화씨 영하 10도로 내려가는 추운 날씨에 벌어진 참으로 가슴 따뜻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도날씨가 추워진다고 침구나 전기 기구들을 나눠주시고 그 외에도 여러 모로 많은 분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전해 받은 한 주였습니다. 로체스터에서처음 맞이하는 겨울이고 실제로 혹독한 추위이지만 전혀 추위를 느끼지못하는 따뜻함이 긴 여운으로 남습니다. “가슴이 따듯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는 예전 커피 광고 카피처럼 실제로 가슴이 따뜻한 이들과 함께 하는것이 눈물 겹게 감사로 다가온 한 주였습니다.

종소리는 귓가에 들리기 전까지 종소리가 아니고, 사랑은 느껴지지 전까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 있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말만 하시지않고 직접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십자가에달려 죽는 것을 지켜보셔야 했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만져지는

(tangible)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은 것만큼 확실한 사랑은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몸으로 실천하는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성탄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성탄만큼 세상에 사랑이 가득한 날도 없죠. 세계 대전이 벌어질 때도 성탄절 만큼은 휴전을 하며 적과 함께 성탄 캐롤을 부르며 이날을 기념했다고 합니다. 성탄을 통해 우리는 몸으로 표현하는 사랑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야 합니다. 만져지는 사랑말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합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발로 행하는 사랑을 피력하셨습니다. 그는 이 뜻을 풀이하며 “관찰보다 애정이, 애정보다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라고 말씀하셨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에 함께 서보는 것이 입장(立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사랑이 바로 입장의 동일함에서 발로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입장에서 다가 오는 사람들을 통해 참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입장의 동일함입니다. 아기 예수를 생각하며 한 없이 낮아지신 그분의 크신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도 아기 예수처럼 다른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발 좋은 성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김경헌 목사님이 꿈꾸는 교회 (9-04-2022)

물질과 소유가 주는 만족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관계가 주는 만족으로 부유한 교회나의 가치와 소중함을 깨달아

다른 이들의 존재를 꽃피워주는 햇살 같은 교회

분열과 다툼으로 평화(샬롬)가 깨어진 세상 속에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치유하는 평화의 교회비틀거리더라도 정의의 길을 걸으며

모든 위선과 불의에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한 교회

부한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의 소리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부르짖음에 경청하며 동행하는 쉼터교회크고 성장하는 교회보다

작더라도 유기적이고 건강한 교회

타고난 기질과 천성이라 핑계대지 않고

습득된 성품으로서 그리스도의 미덕을 추구하는 덕스러운 교회서로의 차이와 다름에 불편해 하기보다

차이와 다름을 통해 아름다워지는 모자이크 교회

일상과 로컬의 소중함을 알아

지역 사회와 함께 동행하며 공생하는 동네 교회

위로 하나님 사랑, 옆으로 성도 사랑,

바깥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균형 잡힌 교회

인간의 편리와 탐욕으로 신음하는 피조세계와 생태계 속에서

온갖 살아 숨쉬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교회 건물 안에 갇히지 않고

향기나는 인격과 성품으로 세상 속에서 열매 맺는 일상 교회멈춤(샤밧)의 소중함과 안식의 가치를 알고

느리더라도 함께 손잡으며 걸어가는 순례자들의 교회

이곳이 마지막 날에나 보게 될 천국인양

하나님 나라를 맛빼기로 보여주는 맛집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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