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비가 자주 내리네요. 이번 주에는 토네이도 경보와 알림 문자까지 울리더군요. 날씨가 참으로 변화 무쌍합니다. 지난 주말 기승했던 무더위가 이번 주의잦은 비로 다 사라졌습니다. 어느새 옥수수는 갈색 밭이 안 보일 정도로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계절의 변화에 감탄하면서도 시간의 속도에 발맞추지 못하고 허덕이는 느낌입니다. 벌써 6월 말이라니 실감이 나시나요? 한 해의 절반이 지난 겁니다. 한 해의 절반을 무사히 보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럼에도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반년을 보낸 것은 아닌지 겸허해집니다. 작년에 옴스테드 메디컬 센터에서 메이요로 병원을 옮겨서 진료를 봐오고 있습니다. 병원을 옮긴 이후 주치의 선생님을 지난 달 처음 만났습니다. 출산 휴가로 1년 이상 비우고 돌아온 의사 선생님이셨습니다. 첫 만남이다 보니 이것 저것 꼼꼼히 물어 주시고 돌봐주시는 느낌이었습니다. 암수술 부위에 대한 팔로업을 4년 동안 하지 못한 터라 선생님께 요구해서 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MRI와 CT 검사를 받게 되었죠. 검사결과가 이번 주에 나왔습니다. 별 다른 특이사항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소견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9년 전 수술 한 부위의 조직 검사 결과가 암으로 판명 됐을 때,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시간이었습니다. 수술 이후 행한 정밀 검사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들었을 때 새 삶을 선물로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저의 삶은 덤으로 주어진 보너스 인생이란 생각으로 살아 왔습니다. 아등바등 내 욕망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치는 삶이 부질 없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선물이요 은혜임을 알게 되었죠. 덤으로 사는 인생이니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루 하루가 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수술 후 9년 동안 아무 이상 없이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생명(生命)을 주신 이유는 사명(使命)을 감당하라신 주님의 뜻임을 믿고 사명을 위해 달려가길 애쓰겠다 다짐해 봅니다. 이곳에 제가 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내게 생명 주신 이가 무슨 사명으로 나를 이곳에 보내셨나 돌아보는 것이지요. 미가서 6장 8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쉬파트를 실천한다는 것은 공평하고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라는 사명이지요. 사회적 지위나 재산의 많고 적음, 다른 어떤 조건과 상관 없이 모두가 동일한 대우를 받고 존중 받는 공동체를 만드는 꿈이 구약 성경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꿈이었습니다. 모두가 존중받고 사람 대우 받는 그런 교회 공동체를 향한 꿈이지요. 헤세드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이 공기가 되는 공동체를 향한 꿈입니다.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사랑과 인자함이 덕이 되고, 그 덕을 이루기 위해 실천하며 나를 다듬어가는 성도들이 되도록 돕는 꿈입니다.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교회 밖 일상에서 우리가 이뤄가야 할 삶의 태도이겠지요. 공의(미쉬파트)와 인자(헤세드)와 일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삼박자가 이뤄지는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꿈을 이루라고 하시네요. 생명의 주인이시며 사명 주신 주님의 무익한 종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합니다.
어느 새 교회력은 성령강림절과 삼위일체 주간을 지나, 연중 시기(年中 時期)로 접어듭니다. 사순절과 부활절 그리고 성탄절 등의 굵직한 절기들 사이의 이 고요한 기간은 반년 가까이 지속됩니다. 이 고요한 기간은 하늘에 오르신 주님의 가르침을 성령님과 함께 일상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따라 살아가는 실전의 시기이지요. 교회는 이 기간에 생명과 희망, 성장을 나타내는 초록색 예전 색깔을 사용합니다. 푸른빛 짙은 이 기간에 우리는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떠올리게 됩니다. 사나흘에 한 번씩 옥수수 밭에 나가 옥수수 성장 사진을 찍었습니다. 처음에는 옥수수 싹이 땅을 비집고 수줍게 나온 모습이 하도 반가워서 사진을 찍다가,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는 지 기록으로 남겨 보고 싶어 시도해 본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자라는 속도가 너무 빨라 사진 찍기를 포기했습니다. 바장이는 아기의 유아 시절에 사진 엄청 찍어 대다 제법 커지면 무슨 사진이냐 하는 그런 느낌이네요. 켈리포니아에서 미네소타에 왔을 때 가장 크게 느껴진 차이는 초록의 깊이였습니다. 스프링클러로 키워낸 켈리의 초록이들과 자연이 만들어낸 창세기표 초록이들의 농도 차이는 확연했습니다. 고향 산천의 소나무 이파리 바탕의 초록과는 또 다른 채도의 초록이 생소했습니다. 생명과 성장의 깊이와 농도가 다른 미네소타의 초록은 제가 이곳에 와서 가장 사랑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미네소타 사람들은 6월에 결혼을 가장 많이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곳에 살아보니 6월만한 때가 없지요? 푸르른 6월을 지나는 우리는 생명과 희망과 성장의 복판을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초록색 표지의 책 한 권이 왔습니다. 제주도 출신의 친구와 책 이야기 하면서 <작별하지 않는다>의 제주도 방언을 너는 해석할 필요도 없이 다 이해하겠구나 했더니, 너도 해석할 필요도 없는 책 한 권 소개해 주마 한 책입니다. 녀석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제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박노해 시인의 <눈물 꽃 소년>입니다. 박노해 시인은 저와 고향이 같은 함평 출신의 시인이십니다. 바닷가 농사꾼의 아들로 자란 시인은 어릴적 이야기들을 전라도 사투리로 하나도 여과 없이 구수하게 풀어냅니다. 그가 말하는 들녘을 상상할 필요가 없었고, 그가 말하는 바닷가를 꾸며낼 필요 없이 기억과 경험을 더듬으며 작가와 함께 호흡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어린 날의 이야기가 내 어린 날의 향수를 자극하자 자연스레 눈물 샘이 터집니다. 시인은 서른 세 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맨 첫 이야기는 할머니의 심부름으로 논에 벼 이삭이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확인하고 오는 것입니다. 어린 시인은 논으로 가는 길을 몰라 할머니에게 못한다고 했더니, 할머니는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가보라고 미션을 줍니다. 성공하고 돌아온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물어물어 찾았당께요. 할무니가 사람이 지도람시요.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하고 물응께요, 다 잘 갈쳐주고 이뻐해 주든디요.”, “잘했다, 잘혔어. 그려 그려, 잘 몰라도 괜찮다. 사람이 길인께. 말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듣는 사람이 빛나고, 안다 하는 사람보다 잘 묻는 사람이 귀인이니께. 잘 물어물어 가면은 다아 잘 되니께.” 사람이 지도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생명과 성장 그리고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의 본 바탕은 초록빛이 분명해 보입니다. 초록의 자연이 영감을 주고 빚어낸 사람들이니까요.
지난 주는 여름 가족 캠프가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가장 많은 분들이 함께 한 캠프인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기에 알차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공동체를 섬겨주신 여러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TF팀은 캠프 전부터 많은 열정을 이미 쏟아 부으셨고 그 결과 진행이 물흐르듯 자연스러웠습니다. 우리교회 대표 레크레이션 게임이 되어버린 “몸으로 말해요”를 비롯한 박진감 넘치는 게임을 인도해 주신 새로운 진행자들 덕에 모두 즐거웠습니다. 새롭게 봉사부를 맡으신 두 분의 자매님 덕에 식사와 간식이 풍성했습니다. 남성분들의 섬김으로 맛있는 스테이크와 양념 돼지구이를 먹는 호사도 누렸지요. 어린 자녀들을 돌봐주신 분들의 수고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야외 쉘터에서 함께 즐겁게 식탁을 나누는 모습을 보는데 뭉클하더라구요. 주님이 우리를 한 가족으로 묶어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매년 맞이하는 우리 교회의 잔치이자 축제날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녁 식사를 사이에 두고 진행된 주제 강의가 힘들지는 않으셨나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 전체가 한 주제를 가지고 스피릿을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가족 캠프가 유일하다는 생각에 야심차게 준비했는데 스피릿은 공유가 되지 못하고 정보만 전달되는 데 그친 것 아닌가 조심스럽습니다. 그래도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예배”라는 주제를 함께 고민하고 생각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가족 캠프가 끝나니 이틀 정도 무너진 몸의 벨런스를 찾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어떤 분께서 집에 심어 놓은 부추 좀 베가라 하셔서, 그 부추로 부추김치를 해 먹었습니다. 부추 김치가 입맛을 돋구고 벨런스를 찾는 데 도움이 되는 듯합니다. 부추 김치를 먹노라니 고향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뒷뜰에서 갓 베어 온 부추로 김치를 담그시고 전을 짖어주곤 하셨던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요 며칠 전에는 미나리를 주신 분이 계셔서 미나리 초무침을 해 먹었습니다. 미나리 무침에 홍어가 빠져서 아쉽긴해도 이역만리에서 미나리 무침이라니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미네소타 한인 교회 목회자 모임에 갔을 때 목사님들께 들은 이야기인데 한인들이 미국 이민와서 고향 음식이 먹고 싶어서 별의 별 노력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 중 하나가 보신탕이었는데, 동양 남자보다 더 소중한 대우를 받고 있는 개들의 천국인 이 나라에서 보신탕이라니 듣고만 있어도 긴장감이 돌더군요. 보신탕을 먹기 위한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한인들의 눈물나는 사투를 들으며 짠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고향의 음식, 그것은 추억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정체성이겠죠. 가족 캠프의 식탁이 한 끼 식사를 떼우기 위한 것 정도라면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한 가족된 우리의 정체성을 나누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누는 것이니 그곳이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일 점심 메뉴인 비빔밥을 먹으며 생각했습니다. 비빔밥 사발에 각양 각색의 먹거리들이 붉은 고추장에 버무려져 어우러지듯, 우리도 서로 취향도 다르고 배경도 다르고 다 다르지만 그리스도의 붉은 피로 하나되어 예수의 향기와 천국의 맛을 내는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 가면 좋겠다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강호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연변 출신의 조선족이었고 친구가 별로 없었죠. 그는 교회 안에서 이곳 저곳 기웃겨렸고 청년부에서도 여러 자매들에게 다가가 보기도 했지만 매번 퇴짜였습니다. 그의 조선족 억양은 그렇게 매력적이지 못했고 오히려 이방인이라는 딱지가 되었죠. 강호는 늘 외로웠고 술과 담배로 찌들어 있었죠. 서울 근교의 여러 공장을 전전하며 고된 노동을 했지만, 특별한 일자리가 없는 부모님을 공양해야 했기에 그는 항상 지쳐있었죠. 그가 유일하게 사랑받는 곳은 국제교회라고 불리우는 교회 내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공동체였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성도님들이 봉사자로 계셨고, 그들은 외근자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스레 나그네들을 섬겼습니다. 강호는 그곳에서 사랑받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는 수시로 국제교회의 책임자였던 저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 했습니다. 교회 근처에 있는 신촌 대학가의 카페들을 돌며 그를 만나곤 했죠. 운봉이라는 조선족 친구는 강호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매우 민첩하고 빠릿빠릿 해서 막노동판에서 제법 인정을 받는 친구였습니다. 하루는 운봉이 새차를 뽑아서 교회에 나타나자 강호의 눈은 이글거렸습니다. 운봉은 그 차로 여자친구와 데이트도 한다고 너스레를 피웠습니다. 강호는 운봉이 부러운 한 편 얄미웠나 봅니다. 운봉은 부모님도 한국에 잘 정착하여 일자리도 있었고, 그들이 중국에서 사놓은 아파트도 있었기에 여러 모로 강호는 운봉이 불편했습니다. 강호는 운봉이 때문에 속상하면 항상 제게 연락했습니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이 흘렀고 저는 중국 선교사로 강호와 이별을 해야 했지요. 수시로 연락하고 만나달라는 강호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잠시 누렸습니다. 중국에 나가고 한동안 연락이 끊겼지요. 하지만 강호는 집요했습니다. 카톡이 잘 되지 않자, 중국인들의 메신저인 웨이신(wechat)으로 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강호가 그곳 교회와 한국 생활에 겉돌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죠. 무소식이 희소식인데, 녀석의 빈번한 연락이 반갑지만은 않았습니다. 미국에 와서도 강호는 가끔 연락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어버이날 당일(한국 시간 5월8일)에 강호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어버이날 축하드린다는 간단한 메시지였죠. “김경헌 목사님 계좌번호 보내주세요 단 돈 만원이라도 어버이 부모님의 날을 축하하는 의미로요” 그는 진짜로 만원을 부쳐왔습니다. 여전히 빠듯한 생활을 하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넉넉한 마음이 저를 미소짓게 합니다. 누군가가 이역만리에서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때론 큰 위로를 줍니다. 작은 인연을 크게 기억하고 기념해주는 친구가 있어서 든든합니다. 강호는 나그네들의 친구로서의 저의 사명과 비전을 늘 일깨워주는 좋은 벗입니다. 오늘은 오랜 저의 벗을 여러분께 소개해드렸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이 정말 의미있고 소중하다는 것을 강호의 어버이날 문자와 선물을 통해 새삼스레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의 좋은 벗이고자 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저는 신대원에 가서야 문리가 트인 사람입니다. 삼십줄에 들어서면서야 공부란 것을 시작했죠. 왜 공부를 해야하는지 그제서야 설득이 됐기 때문입니다. 신대원시절부터 공부에 대한 저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머리가 급속도로 벗겨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가장 심취했던 분야는 성서학이었습니다. 성경 본문을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원문으로 읽는다는 것이 너무나 설렜습니다. 원어 성경을 강독하는 수업을 신대원 내내 꾸준히 들으며 성경 번역과 해석에 몰두 했었죠. 그러면서 성경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몸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2009년에 제가 신대원을 졸업했는데, 그때 즈음부터 그동안 한국 교회가 꾸준하게 사용해 왔던 개역성경에서 새로운 한글 번역본인 새번역 성경을 사용하는 교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 한글 성경의 번역의 역사를 살짝 짚어 보며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성경이 번역된 나라로서, 선교사가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온 전대미문의 국가였죠. 압록강을 통해 청나라를 오고가며 장사를 하던 상인들과 함께 중국에 머무는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조선말 성경이 최초로 번역되었습니다. 누가복음이 가장 먼저 번역됐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초의 번역 성경은 이북 방언과 어휘들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죠. 그렇게 전해져 오던 성경을 1938년에 새롭게 번역한 번역본이 개역성경입니다. 개역은 말 그대로 고쳐서 번역했다는 겁니다. 아예 새롭게 한 것이 아니기에 이북 방언과 고어체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죠. 그 개역성경이 1952년과 1961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따라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으로 다시 개정되었지요. 이 성경을 개역한글판이라 부르고 1961년 이후 지금까지 사용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 개혁 한글판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이 현 시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개역개정성경>입니다. 1993년부터 개역성경(1938년 이후 개역개정까지를 통틀어 개역성경이라함)을 좀 더 현대적인 한국어로 번역하자는 의견을 반영해서 <성경전서 표준새번역> 이 1993년 출간되었죠. 이 표준새번역본을 다시 조금 더 수정하여 좀 더 현대적인 표현으로 개정한 것이 우리 교회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성경전서 새번역>입니다. 흐름이 더디긴 하나 <성경전서 새번역>으로 개역성경을 대체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거 아세요? 그리스말인 헬라어도 여러 종류가 있답니다. 철학자들이 사용한 헬라어와 시장바닥에서 사용한 헬라어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은 시장바닥에서 사용하는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사람들도 진리에 소외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죠. 성경번역본에도 이 원칙이 적용되야 한다 믿습니다. 가장 알아듣기 쉬운 말로 성경은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수십년간 익숙했던 개역개정의 어휘와 어감과 달라 어색하긴 하시겠지만 진리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면 변화는 필요하다 믿습니다. 개역성경과 비교해 가면서 읽는 것도 좋구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좀 더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믿습니다. 새번역본은 대한성서공회라는 권위적인 기관에서 번역을 했고 여러 교단의 신학교의 교수님들과 목사님들이 동참한 한국교회의 권위있는 성경 번역본입니다. 한국 교회내의 변화에 발맞추어 우리 교회도 새번역을 사용해 오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다양한 성경번역본을 읽고 비교하시면서 진리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해 가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을 돕는 것이 저의 사명이니 언제든 저에게 문의해 주시구요.
가끔 질문을 받습니다. “목장이 뭐예요?”, “목장모임은 왜 하는 거예요?” 우리는 왜 목장 모임을 하는 것일까요?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이야 말로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주기적으로 행해지는 목장 모임의 목적이 무엇이고 왜 모이는 지 알고 모이는 것이 정말 중요할 것 같습니다. 제임스 스미스라는 신학자는 교회를 “심장이식재활센터”라는 은유로 설명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던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심장으로 이식되어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심장을 이식 받은 환자는 수술로 치료가 끝나지 않습니다. 재활 치료가 이어집니다. 정기적으로 의사를 만나서 상태를 점검 받고 주기적인 운동과 식단 조절을 해야만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니 끝이 아닙니다. 그 다음부터가 중요합니다. 더욱 건강하고 바른 삶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건강한 삶이란 건강한 인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름아닌 예수의 인격과 성품을 덧입기 위해 노력하는 삶입니다. 구원 이후의 삶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품, 다른 말로 덕이 내 성품과 인격 안에 자라가도록 노력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덕을 함양하는 삶 또는 성화의 과정은 많은 노력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과 실천은 혼자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만드셨죠. 교회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재활센터입니다. 교회 안에는 주기적인 실천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 성찬, 세례, 소그룹, 식탁교제 등이 그것이죠. 이런 것을 주기적으로 실천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의 문법을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보여주고 살아내는 곳입니다. 교회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갖추어야 할 덕을 훈련하고 하나님 나라의 분위기를 익혀갑니다. 소그룹은 그것을 더욱 심화시키고 활성화시키는 곳입니다. 소그룹 식사는 단순한 교제 이상입니다. 식사를 통해 우리는 환대의 문법을 배우고 연습합니다. 말씀 나눔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기회를 갖습니다. 성찰 없이 성숙하고 덕을 덧입기는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를 비춰보는 것입니다. 말씀 나눔을 통해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실천해 보기도 합니다. 서로의 실천과 나눔을 통해 우리는 자극을 받고 함께 성장해 가게 됩니다. 단순한 적용점을 찾아 실천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성찰의 도구로서 나의 삶의 지향을 조정하는 시간이라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날까지 함께 구원을 이뤄가는 공동체입니다. 건강을 위해 운동과 식단을 조절하듯, 교회와 소그룹을 통해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연습하며 빚어져 가게 됩니다. 주기적인 교제와 실천을 통해 삶의 문법과 삶의 지향점이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게 조정되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자기수여의 문법이 나에게 체화될 때까지 끊임 없이 연습하고 훈련해 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그룹은 나를 아름다운 그릇으로 빚어가는 공방 아닐까요?
물질과 소유가 주는 만족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관계가 주는 만족으로 부유한 교회나의 가치와 소중함을 깨달아
다른 이들의 존재를 꽃피워주는 햇살 같은 교회
분열과 다툼으로 평화(샬롬)가 깨어진 세상 속에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치유하는 평화의 교회비틀거리더라도 정의의 길을 걸으며
모든 위선과 불의에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한 교회
부한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의 소리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부르짖음에 경청하며 동행하는 쉼터교회크고 성장하는 교회보다
작더라도 유기적이고 건강한 교회
타고난 기질과 천성이라 핑계대지 않고
습득된 성품으로서 그리스도의 미덕을 추구하는 덕스러운 교회서로의 차이와 다름에 불편해 하기보다
차이와 다름을 통해 아름다워지는 모자이크 교회
일상과 로컬의 소중함을 알아
지역 사회와 함께 동행하며 공생하는 동네 교회
위로 하나님 사랑, 옆으로 성도 사랑,
바깥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균형 잡힌 교회
인간의 편리와 탐욕으로 신음하는 피조세계와 생태계 속에서
온갖 살아 숨쉬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교회 건물 안에 갇히지 않고
향기나는 인격과 성품으로 세상 속에서 열매 맺는 일상 교회멈춤(샤밧)의 소중함과 안식의 가치를 알고
느리더라도 함께 손잡으며 걸어가는 순례자들의 교회
이곳이 마지막 날에나 보게 될 천국인양
하나님 나라를 맛빼기로 보여주는 맛집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