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 주는 노벨상 시상 주간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아니 아시아 여성 작가로서 최초로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죠. 저는 문학을 좋아합니다. 제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문학의 표현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일곱가지의 정서인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을 입체화하는 도구입니다. 역사 또한 사람과 그들의 발자취를 다루지만, 역사는 평면적입니다. 마치 지도라는 평평한 종이에 입체화 된 지구를 담아내듯 역사는 입체화된 사건을 평면화 시켜 딱딱하게 전달합니다. 문학은 평면화된 역사를 다시 끄집어내 생생하게 재현하며 그 속에서 숨쉬고 살아갔던 인간들의 칠정(七情)을 스케취 합니다. 단순한 스케취가 아니라 아름다운 언어와 은유, 비유 등의 표현 도구들을 사용해 최대한 멋스럽게 그려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참된 것(진), 선한 것(선), 아름다운 것(미)을 모두 담아내고 표현할 수 있는 것에 있어 문학은 위대합니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그렇게 44년 전 한 도시에서 있었던 슬픈 역사와 아픔의 기억을 생생하게 재현해 냅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던 그때 그 사건을 다시 끄집어 내 입체화합니다. 운명의 장난일까요?1980년 5월 그 도시에서 행해졌던 계엄령이 이제는 장소를 옮겨 대한민국 수도의 국회의사당에서 재현됩니다. 그것도 44년 전 5월 광주의 역사적 배경이 된 소설에 대한 노벨 문학상의 시상식이 있을 즈음에 말입니다. 만약 이번 계엄령이 3시간만의 즉각적인 해제로 끝나지 않고 계엄 정국이 계속 됐다면, 44년 동안 우리가 공들여 온 민주주의의 후퇴를 보며 민주 시민들의 실망감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서슬퍼르게 살아 있나 봅니다. 광주의 시민들은 한강의 소설과 그녀의 노벨상 수상으로 어느 정도 위로를 받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재현 속에서 정의로운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역사를 보며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거구요. 한 정치인은 “탄핵 트라우마”라는 쓰지 말을 했습다. 광주 시민들의 계엄령의 트라우마를 조금이나 헤아렸다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습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무장 세력을 내세우는 것은 그 어떤 이유에서든 합리화 될 수 없습니다. 평화는 그런 식으로 오면 안 됩니다. 평화는 절대 비폭력적으로 와야 합니다. 폭력과 폭압으로 만들어진 평화는 자발적인 평화의 힘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임하셨고, 참 평화가 어떻게 임하는 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기와 전쟁으로 윽박질러서 억지로 강요된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거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취약한 이의 모습인 아기 예수로 오십니다. 폭력이 아닌 사랑과 우정으로 만들어지는 평화를 몸소 보여주기 위해서였죠. 파란만장한 대림절 기간을 지내고 있을 고국의 동포들에게 평화의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비폭력적으로 항거한 국민들의 평화의 몸짓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나아가 아기 예수가 가져 오실 참 평화의 세상이 속히 이 땅 위에 임하길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아기 예수, 소년 예수여! 오소서! 속히 오소서!
지난 주 며칠 꾀나 쌀쌀한 날이 이어졌습니다. 섭씨로 영하로 내려갔던 날도 있었습니다. 뒷마당에 토마토를 기르는 친구는 갑자기 찾아온 낯선 손님인 서리에 열매들이 상할까봐 덮개를 씌어줬다고 합니다. 기온은 이렇게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며 겨울로 접어들게 되겠지요. 계절의 흐름을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것은 나무들인가 봅니다.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하면 나무들은 이파리로 공급되는 물길을 차단한다고 하죠. 수분공급이 중단된 이파리들은 고운 색으로 물들어가지만 실상은 나무가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입니다. 나무가 이파리들과 작별하기 위해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 단풍일지도 모릅니다. 때를 분별하고 자기를 비우는 비결을 나무로부터 배워야할텐데 자기 비움처럼 어려운 것도 세상에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욕망이 미덕이 된 기이한 사회를 살아갑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욕망을 확대재생산함을 통해 유지됩니다. 그 시대의 셀럽들은 광고의 주체가 되어 사람들의 욕망을 부채질 합니다. ‘당신도 이 물건을 사용하면 가치 있는 인생이 될 수 있다.’라는 무언의 압박을 광고는 담고 있습니다. 물이 바다를 채울 수 없듯 우리의 욕망은 채워질 수 없는 법이죠.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은 ‘이제 그만’이라는 멈춤을 모릅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말하는 죄는 ‘새로운 상품’을 소비하지 않는 것이지요. 다른 이들에게 없는 희소한 것들을 소유함으로 남들과 구별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차별된 소유가 구원이라도 되는냥 그것이 영생이라도 주는 냥 사람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굴레를 돌리느라 사람들은 피곤합니다.
“그들은 은을 길거리에 내던질 것이며, 금을 오물 보듯 할 것이다. 내가 진노하는 날에, 은과 금이 그들을 건져 줄 수 없을 것이다. 은과 금이 그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못하고, 허기진 배를 채워주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은과 금은 그들을 걸어서 넘어뜨려, 죄를 짓게 하였을 뿐이다”(에스겔 7장 19절).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오면 은과 금이 오물로 변한다고 합니다. 돈이 오물로 변하고, 보물이 쓰레기가 된다니요. 그렇게 되면 돈 때문에 인간성을 포기하고 자기의 영혼을 갈아 넣어 돈을 좇아 갔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돈이 주는 전능함과 든든함 때문에 하나님보다 돈을 섬겼던 사람들은 어찌 되냐는 말입니다. 성경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고 권면합니다. 다가올 심판의 날을 대비해서 돈을 가지고 관계를 확장시키라는 말입니다. 돈은 원래 불의한 것이니 그것을 숭배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사랑을 표현하고 관계를 돈독히 하는 도구로 이용하라는 권면이기도 합니다. 그날을 감지하고 자기를 비우는 나무의 지혜를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도 마지막이 있음을 분별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돈은 힘있고 든든한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흡족하게 못하고 허기진 배를 채워주지 못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존재자들(beings)이 아니라 존재(Being) 자체이신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은 돈이 줄 수 없는 만족과 당당함을 갖게 됩니다. 돈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말을 결코 쉽게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로체스터 도시의 변두리에 걸쳐 있는 교회 위치 덕에 너른 밭과 이웃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늘 작은 밭뙤기라도 재미 삼아 경작해 보고 싶은 저에게 너른 밭의 풍경은 흥미롭기만 합니다. 지난 2년 동안 옥수수, 콩, 옥수수 순서로 돌려짓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작년엔 매주 콩을 이곳에서도 경작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줄기가 은근히 딱딱하고 뾰족하게 튀어나온 것들이 많아 장갑을 끼고 힘들게 한 뿌리 한 뿌리 뽑아가야 하는 콩 수확은 쉽지 않은 노동이었죠. 근데 확실히 미국은 다르더군요. 모든 것이 기계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올 5월에 뿌려진 옥수수가 성장해 가는 것을 보는 것이 큰 흥미꺼리였습니다. 유난히 비가 많았던 올 여름, 옥수수가 초고속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 놀랍기만 했죠. 그런데 말입니다~ 미네소타에 이사 오고 한 가지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은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왜 여름 한 철에 옥수수 수확을 안 하느냐는 것이죠. 한국의 경우 옥수수를 하나 하나 따서 수확을 하잖아요. 그런데 이곳에서는 옥수수가 달린 채로 가을까지 그냥 내버려져 있는 것이 항상 궁금했습니다. 옥수수를 사료로 쓰는 것인가? 왜 수확을 안하는 거지? 그 오랜 궁금증이 이번 주에 와서야 드디어 풀리게 됐습니다. 목요일 오전 10시, 거대한 타작 기계가 옥수수 밭에 등장했습니다. 어린 아이 머리깍는 기계라도 되는 냥 커다란 밭을 누비며 옥수수대를 시원 시원 밀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거대한 타작 기계는 어린 시절 벼를 수확할 때 보았던 콤바인과 같은 원리의 그것이었죠. 지금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 무심코 불렀던 콤바인(combine)이란 것이 벼를 베는 것과 낱알을 털어내는 것이 결합된 것이라는 뜻이었던 거군요. 그것도 몰랐다니. 그러니까 이 거대한 기계는 작물을 베어내어 기계 속으로 넣고 거기에 있는 곡물만 털어내고 나머지 줄기와 속은 바로 기계 밖으로 배출해버리는 기계였던 겁니다. 맙소사! 이것이 미국 농업이구나! 그 규모와 효율성에 입이 쩍 벌어지더군요. 거기에 오랜 시간 묵혀 왔던 궁금증이 해소되니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입니다. 콤바인 위로 쌓여 가는 누런 옥수수 알을 바라 보노라니 그것이 마치 황금처럼 밝게 빛나는 것 같았습니다. 저 농부는 황금을 수확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땅이야 말로 황금을 낳는 연금술사가 아닐까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땅이야 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자원인 듯합니다. 하나님은 소중한 것들을 다 공짜로 주셨습니다. 공기, 물, 땅 이 모든 것이 원래 공짜입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것임이라 (레위기 25:23)” 하나님은 토지가 공공의 자산으로 남길 바라셨습니다. 어느 누구에 의해 독점되는 것을 막으신 거죠. 그런데 인간의 탐욕은 땅을 사유화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켜 왔죠. 너른 대지야 말로 인간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의 품입니다. 땅을 만들고 땅으로 온갖 곡식을 만들어 인간을 먹이신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이도 땅의 풍성한 생산 앞에서 소외되지 않길 바라시는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밤엔 팝콘이라도 튀겨서 두런 두런 이야기 나누며 옆집의 옥수수 수확을 함께 즐거워 해봐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생일을 맞아 생일 밥상을 차려볼 엄두를 내봅니다. 도시 여자지만 내 맘대로 시골밥상을 차릴 맘을 먹습니다. 지난 추석에 큰 누나를 만나면서 공수 받아 온 취나물이며 도라지, 고사리 등 말린 나물들을 뜨거운 물로 대쳐 풀어 놓습니다. 생일 밥상이 아니라 정월 대보름 밥상이 될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건 뭘까요? 냉동실에 오랜 시간 묵혀 놓은 도토리묵 가루를 꺼내 묵을 쑵니다. 끓는 도토리 묵을 나무 숫가락으로 열심히 젓고 있노라니 어린 시절 큰 가마솥에 제 얼굴만한 나무 주걱을 가지고 한 솥 가득한 묵을 저으며 어머니를 도왔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음식하시는 어머니 심부름을 하며 저는 음식을 배웠드랬죠. 도토리 묵을 만드는 마지막 화룡정점, 참기름 투하! 이번 참기름은 보통 참기름이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직접 깨농사를 지으시고 읍내 장터에 가셔서 직접 짜서 누님 편에 보내신 엄마표 참기름이니까요. 고소한 참기름 향이 온 집안에 퍼집니다. “지금까지 이런 참기름은 없었다, 이것은 기름인가 어머니인가? 네~ 엄마표 시골 참기름입니다.” 극한직업이라는 영화의 명대사를 페러디해 봅니다. 참기름에 등급제가 있다면 이것은 분명 A+++++, 다섯 개의 에이 플러스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카고 중부마켓에서 큰 맘 먹고 20불짜리 어느 떡집의 참기름도 사봤지만, 실망만 제 몫이었죠. 남도 사람들에게 참기름은 약방의 감초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떡국에도 참기름을 치고, 된장국, 미역국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음식에 참기름을 뿌려대는 습관이 있었죠. 제가 머리가 벗어진 이유도 팔할은 참기름 덕이라는 추측이 난무합니다. 참기름의 향기는 저를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안내합니다.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책 <시간의 향기>에서 시간에도 향기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흥미롭게도 매혹적인 시간의 향기는 실제 향기를 타고 퍼져간다. 후각은 기억과 부활의 기관인 듯하다. 무엇보다 차의 향과 맛에서 촉발된 기억은 특히 강렬한 시간의 향기를 발산한다. 유년의 세계 전체가 이를 통해 소생하는 것이다. 냄새와 향기는 광대한 시간을 거치며 과거 속 매우 깊은 데까지 뻗어있음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최초의 기억들을 유지하는 근간이 되는 것이다. 단 하나의 향기에서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유년의 우주가 깨어일어난다.- 시간의 향기, 78쪽”
‘차의 향과 맛’ 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표현은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을 배경으로 한 표현이죠. 이 소설에서 주인공 마르셀은 이웃집 스완의 집에 방문하여 대접받은 마들렌을 홍차에 찍어 먹으며 갑자기 어린 시절의 추억 속으로 빠져 들어가죠. 향기나 냄새를 통해 살아난 기억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홍차와 마들렌의 향기가 소설의 중요한 소재가 되기 때문이죠. 참기름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네요. 여러분도 여러분만의 소중한 향기 하나쯤은 있으시겠죠? 참기름향기가 이끄는 고향집 어머니 품을 마음 깊이 느껴보는 아침입니다.
미국 내에서 한인교회 사역을 하는 저의 신학대학원 동기들이 제법 있습니다. 개중에 담임목회를 하는 동기들의 모임이 이번 여름에 온라인을 통해 성사됐습니다. 지난 주에 한 번 더 줌을 통해 만남을 가졌습니다. 다들 앞이 보이지 않는 목회 현실에 대한 답답함과 두려움을 솔직하게 고백하더군요. 한 목사님은 LA의 한인 타운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한인들이 교외 지역으로 이주를 해가고 어르신들의 장례만 치르다보니 자기가 나아가야 할 목회의 방향이 어디인지 감을 잡기가 힘들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더군요. 딱히 뭐라 답해줄 말이 없었지만 마음 속에 한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길을 갈 수가 있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헝가리의 철학자 루카치가 <소설 이론> 첫 머리에 쓴 글입니다. 별을 보고 길을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 삶을 무한 혹은 영원의 세계와 관련시켜 조망한다는 말이 아닐까요? 세상은 우리로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땅의 현실에만 눈을 돌리도록 만듭니다. 하늘을 잊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죠. 이 시대에 큰 정신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아마도 거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있음 자체로 다른 이들의 좁은 마음을 넓혀 주고, 시야를 확장시켜 주는 그런 사람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내 몸을 완전히 기댈만한 든든한 벽을 가지고 싶다. 참 마음으로 나를 안아 주는 크고 안전한 가슴을 가지고 싶다. 나를 속이는 내 마음의 괴로움을 숨김 없이 말할 수 잇는 사랑을 가지고 싶다.” 시인 김달진의 고백입니다. 이정표를 잃고 갈 길 몰라 답답해 하는 이들에게 이런 사람 한 명 있다면 참 좋을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동기들과 만남이 무르익으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서로에게 별이 되어 주라고, 서로에게 든든한 기댈 벽이 되어 주라고 우리를 묶어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민 목회 현실이 아무리 암담하고 갈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함께 기대어 하늘을 바라 본다면 그곳에 뭔가 돌파구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꿈틀 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임에 참석한 동기들이 저 보고 그 모임의 이름 하나 지어보라는 숙제를 주더군요.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다 영감이 생겼습니다. “더불어 숲” 어떤 가요?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혼자서는 버겁고 혼자서는 해쳐 나갈 수 없을 법한 현실이지만 함께 할 때 우리는 숲이 되어, 신선한 상상력을 만들어 내며 상쾌한 희망을 발산할 수 있을 것을 믿기 때문이죠. 동기들이 받아들여 줄 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냥 상상만 해도 좋습니다. 더불어 숲이라니 벌써부터 힘이 불끈 솟아 오르네요. 서로에게 든든할 기댈 벽이 되어주고, 참 마음으로 끌어 안아 주고, 숨김 없이 내 마음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여러분은 있으신가요? 교회가 그런 곳이어야 겠지요? 우리가 더불어 함께 만들어갈 푸른 세상, 따뜻한 세상을 기대해 봅니다. 더불어 숲, 우리 교회의 모습이길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먼저 백석(白石)의 시 한 편을 함께 나눕니다. 제목은 고향(故鄕)입니다.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故鄕)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씨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醫員)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이 따스하고 부드러워서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백석, “고향(故鄕)”
백석(白石)의 시는 참 따뜻합니다. 백석은 일제강점기에 평안도 정주에서 태어났고, 젊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국에서 교사를 하다 만주국으로 넘어가 작품 활동을 한 시인입니다. 그의 대표시가 고향이면서 그의 작품의 주요 키워드 또한 고향입니다. 그의 작품에서 그려지는 고향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지만 안식과 평화로움의 정신적 가치를 제공하는 공동체의 유대가 남아 있는 신화적 공간으로 묘사되지요. 아마도 그의 이력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여러 나라와 지역을 옮겨다니며 살아 온 나그네 삶의 고단함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청소년 시기에 유학을 시작하였으니 고향에서의 삶이라야 불과 십 여년 정도였겠지만 고향은 그의 평생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자 이상향이 되었지요. 타향살이에서 가장 서러울 때는 아플 때입니다. 혼자 앓아 눕다 찾아간 의원이 마침 아버지의 친구였다니! 부처같은 상에 관우 장군의 수염을 가진 그 의원은 타향살이에 지친 그에게 고향이 되어줍니다. 누군가에게 고향이 되어주는 삶이란 것이 별 것이겠습니까? 미소가 담긴 따뜻한 말 한마디, 부드러운 손길 하나면 충분한 듯 합니다. 이웃 사랑도 별 것이겠습니까? 고향이 그리운 이들에게 고향이 되어주는 것 정도라면 우리도 한 번 해봄 직 하지 않나요?
8월이 저물어 갑니다. 제가 이곳에 온지도 이제 만 2년이 되었습니다. 벌써 2년이네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2년 전 여름, 로드트립으로 켈리포니아에서 미네소타로 이동해 오던 길들이 아직 눈에 선하네요. 아이다호에서 콜로라도의 덴버로 향하는 시골길이었는데 비포장 도로에 안개까지 자욱하게 낀 길을 달리고 있었죠. 마침 “Love never fails”라는 찬양이 차 안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후렴부 클라이막스의 가사가 반복되었고 저와 아내는 그 고조된 분위기에 맞추어 뜨겁게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께 돌아가자, 우린 돌아서도, 그는 변치 않네, 여호와께 돌아가자, 우린 넘어져도, 그 사랑 영원하네.” 우리는 그야말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짐작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가라하시니 그분을 따라 가보기로 한 것이었죠. 비장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며 부르짖으며 안개 길을 뚫고 지나온 그 길이 가장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여러분을 만났드랬죠. 2년 동안 저를 한 식구로 여겨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보살펴 주신 여러분의 가족 같은 사랑을 절대 잊지 못합니다. ‘가족 같은’이 아니라 진짜 가족이었죠. 부족한 저를 기다려 주시고 토닥여 주시고 물심 양면으로 사랑을 표현해 주신 여러분들이 계셨기에 참 행복했던 시간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에게 감사하다고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장자(莊子) 외편(外篇)의 추수(秋水)에 우물안 개구리 우화가 나옵니다. “우물 안 개구리(井低蛙)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 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장자는 교조(敎條)에 갇혀 사고를 확장하지 못하고 있는 당시의 제자백가들을 우물 안 개구리에 비유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복음이 우리의 생각과 교리나 교조보다 훨씬 크고 넓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자신이 익숙해진 교회 전통이나 교조에 갇혀 그것이 전부인냥 예수님의 넓디 넓은 복음의 이야기를 다 헤아리지 못하고 전달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북극을 탐험하는 탐사대에서 네비게이션을 다루는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방향을 잘 못 잡아 딴 길로 세버리면 팀원 전체의 목숨이 위태해지기 때문이죠. 목사는 탐사대의 네비게이션을 맡은 자와 같다 생각해 왔습니다. 말 그대로 잘못된 길로 오도(誤導)할 때 그 책임은 엄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우물 안 개구리이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오도하지 않고 바른 방향으로 선도(善導)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바울의 말처럼 저는 아직 이룬 것도 아니고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부름의 상을 향해 계속 정진하려 합니다. 드넓은 예수의 바다로 향해 가는 이 여정에 다하나교회 교우들과 하나가 되어 동행하고 있는 것이 저에게는 큰 자랑입니다. 지난 2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부르심의 상을 향해 우리 함께 달려가길 소망합니다!
처음에 여기에 쓰는 글이 목회칼럼이었다가 어느새 목회편지로 바꼈었는데 알고 계셨나요? 칼럼하면 웬지 딱딱한 신문의 투고 글 느낌이지만 편지는 더 다정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라 칼럼이 편지로 바꼈던 것이죠. 제가 여러분과 소통하는 창구로 생각하고 글을 써오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편지를 읽고 있을까 확신은 없지만 그럼에도 제 마음을 여러분에게 나눌 통로가 있음에 감사하며 매주 편지를 드리고 있답니다.어린 시절 학교에서 부모님께 편지를 써야 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누가 가르쳐 줬는지 모르지만 “부모님 전상서(前上書)”를 편지의 맨 첫머리에 쓰고나서 편지를 써내려 갔습니다. 저희 때는 대충 마무리했지만 저보다 앞 세대들에겐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의 끝머리도 정해진 틀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불초소자 막내 아무개 올림”, ‘소자’(小子)란 부모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말입니다. ‘불초’(不肖)란 닮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초(肖)는 닮았다는 뜻이니까요. 초상화(肖像畵)에 쓰이는 한자입니다. 불초란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뜻이니, 부모님 앞에서 한 없이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겸손히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덕성을 닮지 못한 존재이자 아버지에 미치지 못하는 자녀의 고백입니다.
이 불초소자(不肖小子)의 마음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목표는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다른 이들에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덕성이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흘러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나를 통해 타자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불초가 아니라 하나님을 그대로 빼닮은 하나님의 초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단장하기 위해 거울을 봐야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내가 다른 이들에게 비춰지는 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덕성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속에 굳어진 우리의 다듬어진 마음의 상태이자 일관된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마음의 이미지가 우리의 얼굴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고 흘러가기 때문에 덕성을 기르고 품성을 다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를 위해서 마음의 거울이 필요합니다. 다른 이에게 비쳐지는 모습을 가다듬기 위해 거울이 필요하듯, 내 마음과 성품을 아름답게 단장해 가기 위해 마음의 거울이 필요합니다. 성찰(省察, reflection)이야 말로 우리 마음을 비쳐보는 훌륭한 거울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나를 비쳐보고, 기도를 통해 내 마음을 살피는 성찰은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내 삶에 행해진 불초의 태도와 행동들을 성찰을 통해 다듬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찰은 주기적으로 반복되어야 합니다. 매일 거울을 보듯 주기적으로 우리 삶 속의 불초를 다듬어가야 합니다. 불초소자의 마음으로 겸손히 자기를 살피는 우리 모두이길 바랍니다.
가끔 질문을 받습니다. “목장이 뭐예요?”, “목장모임은 왜 하는 거예요?” 우리는 왜 목장 모임을 하는 것일까요?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이야 말로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주기적으로 행해지는 목장 모임의 목적이 무엇이고 왜 모이는 지 알고 모이는 것이 정말 중요할 것 같습니다. 제임스 스미스라는 신학자는 교회를 “심장이식재활센터”라는 은유로 설명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던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심장으로 이식되어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심장을 이식 받은 환자는 수술로 치료가 끝나지 않습니다. 재활 치료가 이어집니다. 정기적으로 의사를 만나서 상태를 점검 받고 주기적인 운동과 식단 조절을 해야만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니 끝이 아닙니다. 그 다음부터가 중요합니다. 더욱 건강하고 바른 삶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건강한 삶이란 건강한 인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름아닌 예수의 인격과 성품을 덧입기 위해 노력하는 삶입니다. 구원 이후의 삶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품, 다른 말로 덕이 내 성품과 인격 안에 자라가도록 노력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덕을 함양하는 삶 또는 성화의 과정은 많은 노력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과 실천은 혼자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만드셨죠. 교회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재활센터입니다. 교회 안에는 주기적인 실천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 성찬, 세례, 소그룹, 식탁교제 등이 그것이죠. 이런 것을 주기적으로 실천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의 문법을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보여주고 살아내는 곳입니다. 교회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갖추어야 할 덕을 훈련하고 하나님 나라의 분위기를 익혀갑니다. 소그룹은 그것을 더욱 심화시키고 활성화시키는 곳입니다. 소그룹 식사는 단순한 교제 이상입니다. 식사를 통해 우리는 환대의 문법을 배우고 연습합니다. 말씀 나눔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기회를 갖습니다. 성찰 없이 성숙하고 덕을 덧입기는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를 비춰보는 것입니다. 말씀 나눔을 통해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실천해 보기도 합니다. 서로의 실천과 나눔을 통해 우리는 자극을 받고 함께 성장해 가게 됩니다. 단순한 적용점을 찾아 실천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성찰의 도구로서 나의 삶의 지향을 조정하는 시간이라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날까지 함께 구원을 이뤄가는 공동체입니다. 건강을 위해 운동과 식단을 조절하듯, 교회와 소그룹을 통해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연습하며 빚어져 가게 됩니다. 주기적인 교제와 실천을 통해 삶의 문법과 삶의 지향점이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게 조정되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자기수여의 문법이 나에게 체화될 때까지 끊임 없이 연습하고 훈련해 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그룹은 나를 아름다운 그릇으로 빚어가는 공방 아닐까요?
지난 한 주 날씨가 변화무쌍했지요? 주초에 봄비가 연두빛깔 아우성으로 잠자는 생명을 깨우듯 힘 있게 내렸습니다. 농사꾼의 자녀들이 비를 반기는 이유가 비가 오면 그날은 농사일을 쉬기 때문이라는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비가 오면 설렙니다. 이슬비로는 일을 쉬지 않으니 주럭주럭 힘 있게 내리는 비여야만 반갑습니다. 주말로 가면서 점점 날씨도 추워지고 바람이 거세집니다. 안락하고 따뜻함에 익숙한 비루한 몸이라 그런지 바람을 맞으며 우뚝 서서 걸을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바람부는 날엔 좋아하는 산책도 멈추고 아직은 앙상한 흔들리는 가지들만 창밖으로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다채로운 봄날씨 앞에서 이것이 우리네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네 인생이야 말로 명과 암이 공존하고, 바람은 언제 불어 닥칠지 알 수 없고, 궂은 날과 맑은 날이 대중 없이 교차합니다. 인생이 일기예보 정도만큼이라도 한 치 앞을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고요한 일상에 갑자기 불어 닥치는 풍파에 정신을 못차리고 나가 떨어지곤 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변화는 우리를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통로가 되어주는 것은 아닐까요? 겨울에서 봄으로 옮겨 가려고 만물이 요동하며 몸부림 치듯, 우리 삶에 불어 오는 변화와 풍파들은 우리 삶에 시작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일기예보는 아닐까요. 어떤 이는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이곳의 삶의 특성상 떠나는 이들이 낯설지 않고 보내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새가 부화하려면 알을 깨고 나와야 하듯이 익숙한 것을 깨고 새로운 환경 가운데로 옮겨 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더 큰 세계를 향한 도약이 될 수 있습니다. 나그네 삶을 즐기는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이민자로서 나그네 삶에 경제적인 어려움 보다도 더 큰 것은 정서적 긴장감일 것입니다. 지속적인 긴장 속에 머물 때 마음속 여백은 줄어들고 삶은 여유를 잃게 됩니다. 여백과 여유를 잃은 삶은 날카로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말은 퉁명스러워지고 표정 또한 어둡고 싸늘해 지기 쉽습니다. 원망이 커지고 분노심을 주체할 수 없어지기까지 합니다. 그럴 수록 더 큰 세계를 향해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몸의 자세를 바꾸면 생각이 바뀐다고들 합니다. 여행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굳이 돈들고 집떠나 고생하는 것이지만 자세를 바꾸고 시선을 바꾸기 위해 여행만큼 좋은 것도 없습니다. 산책은 여행을 대체할 다음 처방전입니다. 농사 짓던 시절 포대에 곡식을 담을 때 곡식의 빈틈을 매꿔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하려고 포대를 들었다 놨다 반복하며 추겨 세우곤 하죠. 산책이 마치 그 동작을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걷기를 반복하다 보면 긴장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해소됨을 느낍니다. 계절의 변화와 인생의 변화 앞에서 초라해지는 우리지만, 그 변화 속에서 우리네 삶에 일어날 긍정적인 가능성들을 상상해 봅니다. 다채롭고 버라이티한 우리네 삶이지만 그 안에서 여백을 찾고 여유를 찾아 따뜻하고 부드럽게 타자들을 보듬어 주는 삶이길 바라봅니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MBTI 성격 유형에서 N(직관)이 발달한 저로서는 공식을 이해하고 대입하고 적용하는 수학이라는 과목이 다른 나라 말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공식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는 듯합니다. 최근에 어떤 목사님께서 H=C/D 라는 공식을 말씀하시더군요. ‘이게 뭐지? 아 또 공식인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H-Happiness, C-Capital, D-Desire 라는 힌트를 드리면 좀 감이 오시나요? 행복은 욕망 분의 자산이라는 공식입니다. 자산(C) 안에는 돈, 재산, 소유 등의 유형의 자산도 있지만 인맥과 같은 무형의 자산도 포함된다고 합니다. 예전에 비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편리해 졌고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는 사회관계망(SNS)이라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시스템 덕에 더욱 편리해지고 접근이 쉬워졌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고 하소연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행복을 갉아 먹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분모인 욕망(Desire)이 자산의 증가 보다 훨씬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소유와 소비가 증가한 만큼 우리들의 욕망은 배가 되었습니다. 아니 소유와 소비를 따르는 세상 풍조에 휩쓸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더 큰 욕망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예전에 못 살던 시절보다 훨씬 행복하지 않고 관계의 결핍을 호소할 뿐만 아니라 외로움과 우울에 시달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행복의 비결은 욕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욕망의 값을 조절하려는 것보다 아예 욕망의 방향을 바꿔버리는 것이죠. 모두가 경쟁을 통해 자산을 확보할 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여 행복을 찾고자 하는 욕망을 따르지 않고 아예 다른 욕망을 따르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경쟁과 배제, 혐오를 통해 다른 이를 도태시켜 누리는 행복이 아니라, 포용하고 상생하고 연대하며 환대를 통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우리 주님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내 자신의 필요와 내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Ego를 향했던 욕망의 방향을 나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인 타자를 향해 수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이 욕망을 재조정하는 과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생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천국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마음의 다짐과 함께 시작됩니다. 천국의 삶이란 타자를 위해 나를 선물로 주는 자기 수여의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를 주로 믿고 그가 몸소 보이신 삶을 따라가겠다고 결단한 이후부터 우리의 욕망은 조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욕망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욕망하는 방향의 전환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교회 생활과 소그룹은 바로 이 욕망 재조정의 훈련소라 할 수 있습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있지만, 다른 이와 함께 함으로 더 행복하다는 것을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환대와 연대, 포용과 공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음을 함께 배워가는 것입니다. 행복의 비결은 욕망의 방향을 조정하는 길이 아마 제일 빠를 걸요?
그날 삭풍에 느즈막이 피어난 매화꽃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셋째 아들의 출산을 단 며칠 남겨두고 제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매화꽃 마냥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2016년 2월 말에 귀 밑 이하선이라는 침샘에 나있는 종양을 떼내는 수술을 했습니다. 안면 신경을 감싸고 있던 종양을 떼내는 수술은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주치의 선생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지만 떼어낸 종양의 조직이 악성으로 판명났습니다. 부랴부랴 악성 세포들이 몸에 퍼졌는지 검사를 해야했고 그 검사를 기다리는 1주일의 기다리는 시간에 집주변을 산책하며 흔들리는 매화와 마주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별다른 이상이 없어서 수술과 함께 치료를 종료한다는 소식과 함께 기쁨과 환희의 부활절을 맞이했었죠. 그때만큼 감격적인 부활절도 없었습니다. 3월 27일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고 난 후 나흘만에 막내 녀석이 태어났으니 이 녀석은 그야말로 부활둥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막내의 출산이 없었더라면 한국에 나와 검사와 치료도 받을 수 없었을 것이고 중국에서 계속 병을 키우고 있었을테니 녀석이야 말로 저를 부활시켜준 부활둥이였습니다. 흔들리는 매화 앞에서 저를 찾아와 주셨던 주님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부활의 주님은 흔들리는 우리네 삶에 다가와 주시곤 합니다.
흔들리던 제자들에게 다가 오셨던 부활의 예수님은 참 따뜻했습니다. 주님은 부활 후 제자들을 찾을 때마다 먹을 것을 준비하시곤 하셨죠. 주님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묻곤하셧죠. 요즘 말로 치면 “밥은 먹고 다니니?”일 것입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하며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던 수제자 베드로는 주님을 볼 면목이 없었을텐데, 그에게 주님은 “얼굴이 그게 뭐니?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녀야지. 이리와~ 생선 궈놨으니 한 술 들자!” 하셨죠. 또 한 번은 부활의 주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찾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달려서 세 시간 동안 몸부림 치던 것을 직접 보았죠.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냐고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어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던 예수를 보며 그들은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죽음이 최후의 판결자라고 확신하고 낙향하기로 한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에 온통 사로잡혀 있던 그들을 주님은 친히 찾아가시어 그들과 저녁 식탁을 함께 해 주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보여주신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바로 ‘환대’였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주님은 흔들리는 자기 백성들을 기꺼이 찾아가십니다. 이직, 결혼, 출산, 건강, 경제적인 고통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을 그냥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찾아가시어 기어코 다시 일어날 힘을 주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들은 모두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이 판 치는 세상 한 가운데로 보내진 자들이지만, 죽음에 맞서 싸우는 동아리인 교회의 일원입니다. 때론 흔들릴 지언정 아주 엎드러지지 않음은 부활의 주님과 형제 자매들이 우리를 따뜻하게 환대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날 삭풍에 느즈막이 피어난 매화꽃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셋째 아들의 출산을 단 며칠 남겨두고 제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매화꽃 마냥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2016년 2월 말에 귀 밑 이하선이라는 침샘에 나있는 종양을 떼내는 수술을 했습니다. 안면 신경을 감싸고 있던 종양을 떼내는 수술은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주치의 선생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지만 떼어낸 종양의 조직이 악성으로 판명났습니다. 부랴부랴 악성 세포들이 몸에 퍼졌는지 검사를 해야했고 그 검사를 기다리는 1주일의 기다리는 시간에 집주변을 산책하며 흔들리는 매화와 마주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별다른 이상이 없어서 수술과 함께 치료를 종료한다는 소식과 함께 기쁨과 환희의 부활절을 맞이했었죠. 그때만큼 감격적인 부활절도 없었습니다. 3월 27일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고 난 후 나흘만에 막내 녀석이 태어났으니 이 녀석은 그야말로 부활둥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막내의 출산이 없었더라면 한국에 나와 검사와 치료도 받을 수 없었을 것이고 중국에서 계속 병을 키우고 있었을테니 녀석이야 말로 저를 부활시켜준 부활둥이였습니다. 흔들리는 매화 앞에서 저를 찾아와 주셨던 주님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부활의 주님은 흔들리는 우리네 삶에 다가와 주시곤 합니다.
흔들리던 제자들에게 다가 오셨던 부활의 예수님은 참 따뜻했습니다. 주님은 부활 후 제자들을 찾을 때마다 먹을 것을 준비하시곤 하셨죠. 주님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묻곤하셧죠. 요즘 말로 치면 “밥은 먹고 다니니?”일 것입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하며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던 수제자 베드로는 주님을 볼 면목이 없었을텐데, 그에게 주님은 “얼굴이 그게 뭐니?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녀야지. 이리와~ 생선 궈놨으니 한 술 들자!” 하셨죠. 또 한 번은 부활의 주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찾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달려서 세 시간 동안 몸부림 치던 것을 직접 보았죠.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냐고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어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던 예수를 보며 그들은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죽음이 최후의 판결자라고 확신하고 낙향하기로 한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에 온통 사로잡혀 있던 그들을 주님은 친히 찾아가시어 그들과 저녁 식탁을 함께 해 주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보여주신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바로 ‘환대’였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주님은 흔들리는 자기 백성들을 기꺼이 찾아가십니다. 이직, 결혼, 출산, 건강, 경제적인 고통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을 그냥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찾아가시어 기어코 다시 일어날 힘을 주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들은 모두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이 판 치는 세상 한 가운데로 보내진 자들이지만, 죽음에 맞서 싸우는 동아리인 교회의 일원입니다. 때론 흔들릴 지언정 아주 엎드러지지 않음은 부활의 주님과 형제 자매들이 우리를 따뜻하게 환대해주기 때문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도둑입니다. 그는 아테나이로 들어가는 관문에서 지키고 서 있다 나그네가 지나가면 그를 데리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침대에 눞여 죽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침대보다 나그네가 크면 잘라서 죽이고, 작으면 늘여서 죽였습니다. 그는 차이를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틀에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고 집어 넣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지금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빗대곤 합니다. 사람은 사이 존재라고들 합니다. 인간이 사이 존재라는 것은 인간(人間)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 사이를 나타내는 말이기도하지만, 인간의 현존을 나타내는 두 개념인 시간(時間)과 공간(空間) 또한 사이라는 말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를 살아가며, 하늘과 땅 사이의 이곳에 살아갑니다. 사이 존재인 인간은 ‘차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홀로 떨어져 살아갈 수 없고, 나와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우러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폭력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가두는 격입니다. 자기와 다른 것은 모두 불온한 것이며 잘라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누구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하나씩 지니고 살아갑니다. 나의 생각, 나의 경험, 나의 견해, 나의 취향을 절대화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재단하려 나섭니다. 부먹이 옳으니 찍먹이 옳으니 하며 내가 선호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따라야 한다고 우기기도 합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 계명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리, 그러니까 ‘기준’이 되는 절대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기준이 되는 순간 우리는 ‘절대’라는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뜻에 따라 다른 이를 지배하고 조정하려는 악마의 일의(一意)적인 욕구에 대한 사랑의 저항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의 절대 권력을 내려 놓고 다른 이를 위해 나무 틀에 자기를 못박는 것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반대 극점에 십자가가 놓여 있는 것이지요. 고난 주간이 이제 시작됩니다. 고난 주간은 예수의 십자가를 지는 흉내라도 내보겠다고 주님을 따라가보는 절기입니다. 1년에 한 주라도 십자가 지는 삶을 따라보겠다고 작정하는 기간이지요. 우리는 모두 자기애의 중력이 우리를 잡아 끄는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고난 주간 만큼은 우리가 그 징글징글한 자기애의 중력을 자기 부정의 날선 검으로 잘라내기 위해 몸부림 쳐 보는 기간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부탁하신 주님은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신 삶의 결과 하늘로 들어 올리시게 됩니다. 자기애의 Gravity에서 해방되어 주님의 Grace가 나를 자유케하는 부력을 맛보는 것은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도둑입니다. 그는 아테나이로 들어가는 관문에서 지키고 서 있다 나그네가 지나가면 그를 데리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침대에 눞여 죽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침대보다 나그네가 크면 잘라서 죽이고, 작으면 늘여서 죽였습니다. 그는 차이를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틀에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고 집어 넣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지금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빗대곤 합니다. 사람은 사이 존재라고들 합니다. 인간이 사이 존재라는 것은 인간(人間)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 사이를 나타내는 말이기도하지만, 인간의 현존을 나타내는 두 개념인 시간(時間)과 공간(空間) 또한 사이라는 말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를 살아가며, 하늘과 땅 사이의 이곳에 살아갑니다. 사이 존재인 인간은 ‘차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홀로 떨어져 살아갈 수 없고, 나와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우러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폭력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가두는 격입니다. 자기와 다른 것은 모두 불온한 것이며 잘라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누구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하나씩 지니고 살아갑니다. 나의 생각, 나의 경험, 나의 견해, 나의 취향을 절대화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재단하려 나섭니다. 부먹이 옳으니 찍먹이 옳으니 하며 내가 선호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따라야 한다고 우기기도 합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 계명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리, 그러니까 ‘기준’이 되는 절대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기준이 되는 순간 우리는 ‘절대’라는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뜻에 따라 다른 이를 지배하고 조정하려는 악마의 일의(一意)적인 욕구에 대한 사랑의 저항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의 절대 권력을 내려 놓고 다른 이를 위해 나무 틀에 자기를 못박는 것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반대 극점에 십자가가 놓여 있는 것이지요. 고난 주간이 이제 시작됩니다. 고난 주간은 예수의 십자가를 지는 흉내라도 내보겠다고 주님을 따라가보는 절기입니다. 1년에 한 주라도 십자가 지는 삶을 따라보겠다고 작정하는 기간이지요. 우리는 모두 자기애의 중력이 우리를 잡아 끄는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고난 주간 만큼은 우리가 그 징글징글한 자기애의 중력을 자기 부정의 날선 검으로 잘라내기 위해 몸부림 쳐 보는 기간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부탁하신 주님은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신 삶의 결과 하늘로 들어 올리시게 됩니다. 자기애의 Gravity에서 해방되어 주님의 Grace가 나를 자유케하는 부력을 맛보는 것은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는 어떤 의미인가요? 교회가 여러분 각자의 삶에 주는 의미는 모두가 다 다르리라 생각됩니다. 어린 시절 저에게 교회는 놀이터였습니다. 집과 바로 이웃한 교회는 널직한 마당이 있었고 또한 그곳에는 넉넉하고 너른 마음의 목사님과 사모님이 계셨죠. 그분들은 항상 저를 환영해 주셨습니다. 집에서는 먹어보지 못한 간식들을 대접해 주시기도 했죠. 예배당 안의 의자들 밑에 숨어 숨바꼭질을 하기도 하고 교회의 큰 기둥을 이용해 나이먹기라는 놀이도 했습니다. 겨울에는 목사님께서 예배당의 난로에 불을 지펴주시면 옹기 종기 모여 앉아 그 따스함을 즐기곤 했죠. 겨울 난로만큼 교회는 따뜻한 곳이었습니다. 청년이 되어 교회 어른들과 함께 중국 감숙성의 산골 오지 소수민족을 돕는 의료선교에 동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선교를 마치며 감숙성 란저우라는 도시의 한 호텔에서 모두 함께 가족의 시간이라는 공동체의 나눔을 가졌습니다. 벅찬 선교의 현장을 떠나야 하는 아쉬움과 이곳에 계속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필요성에 선교사를 한 명 파송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견이 즐거운 분위기에서 나왔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제가 이듬해에 교회의 파송을 받아 평신도 선교사로 그땅을 다시 밟게 되었죠. 그들은 검증되지 않은 한 명의 대학생을 신뢰하여 보내는 대담함을 보였습니다. 교회가 한 명의 선교사를 잉태하고 그를 낳아 선교지에 보내본 경험은 의료선교에 동참했던 모두가 느끼는 감격이었습니다. 제 지난 삶을 돌아보니 교회는 그야 말로 저에게 어머니의 품이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태어났고 교회가 저를 길렀으며 저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의 순교자였던 키프리아누스는 여성의 출산과 양육 이미지를 통해 교회를 어머니로 소개했습니다. 그의 글을 간단히 인용해 봅니다. “교회의 자궁으로부터 우리는 태어났고, 교회의 젖을 먹고 양육되며, 교회의 숨결을 호흡하며 소생한다.…만일 당신이 교회를 당신의 어머니로 가지지 못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어머니만큼 이타적인 존재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요? 어머니는 사람이 자기를 타자에게 선물로 줌을 통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상입니다. 건강한 교회에 몸담은 사람들은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 자란 아이들과도 같습니다.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존재로 자라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은 불신자라도 건강한 교회에 매주일 참석하다보면 그는 교회의 품속에서 거듭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그 널직한 교회의 품에서 놀다 어느새 목사까지 된 사람입니다. 그 품이 너무 따뜻했습니다. 교회를 통해 만난 선교의 동역자들은 평생지기로 지내는 제 2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제가 평생 교회에 몸담고 성도들을 섬기는 이유는 어머니된 교회의 품을 더 많은 이들에게 맛보게 해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는 어떤 의미인가요? 교회가 여러분 각자의 삶에 주는 의미는 모두가 다 다르리라 생각됩니다. 어린 시절 저에게 교회는 놀이터였습니다. 집과 바로 이웃한 교회는 널직한 마당이 있었고 또한 그곳에는 넉넉하고 너른 마음의 목사님과 사모님이 계셨죠. 그분들은 항상 저를 환영해 주셨습니다. 집에서는 먹어보지 못한 간식들을 대접해 주시기도 했죠. 예배당 안의 의자들 밑에 숨어 숨바꼭질을 하기도 하고 교회의 큰 기둥을 이용해 나이먹기라는 놀이도 했습니다. 겨울에는 목사님께서 예배당의 난로에 불을 지펴주시면 옹기 종기 모여 앉아 그 따스함을 즐기곤 했죠. 겨울 난로만큼 교회는 따뜻한 곳이었습니다. 청년이 되어 교회 어른들과 함께 중국 감숙성의 산골 오지 소수민족을 돕는 의료선교에 동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선교를 마치며 감숙성 란저우라는 도시의 한 호텔에서 모두 함께 가족의 시간이라는 공동체의 나눔을 가졌습니다. 벅찬 선교의 현장을 떠나야 하는 아쉬움과 이곳에 계속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필요성에 선교사를 한 명 파송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견이 즐거운 분위기에서 나왔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제가 이듬해에 교회의 파송을 받아 평신도 선교사로 그땅을 다시 밟게 되었죠. 그들은 검증되지 않은 한 명의 대학생을 신뢰하여 보내는 대담함을 보였습니다. 교회가 한 명의 선교사를 잉태하고 그를 낳아 선교지에 보내본 경험은 의료선교에 동참했던 모두가 느끼는 감격이었습니다. 제 지난 삶을 돌아보니 교회는 그야 말로 저에게 어머니의 품이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태어났고 교회가 저를 길렀으며 저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의 순교자였던 키프리아누스는 여성의 출산과 양육 이미지를 통해 교회를 어머니로 소개했습니다. 그의 글을 간단히 인용해 봅니다. “교회의 자궁으로부터 우리는 태어났고, 교회의 젖을 먹고 양육되며, 교회의 숨결을 호흡하며 소생한다.…만일 당신이 교회를 당신의 어머니로 가지지 못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어머니만큼 이타적인 존재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요? 어머니는 사람이 자기를 타자에게 선물로 줌을 통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상입니다. 건강한 교회에 몸담은 사람들은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 자란 아이들과도 같습니다.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존재로 자라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은 불신자라도 건강한 교회에 매주일 참석하다보면 그는 교회의 품속에서 거듭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그 널직한 교회의 품에서 놀다 어느새 목사까지 된 사람입니다. 그 품이 너무 따뜻했습니다. 교회를 통해 만난 선교의 동역자들은 평생지기로 지내는 제 2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제가 평생 교회에 몸담고 성도들을 섬기는 이유는 어머니된 교회의 품을 더 많은 이들에게 맛보게 해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 공부가 두번째 강의까지 마쳤습니다. 사도신경은 무엇인가요? 사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를 의미하는 것이고, 신경이란 믿음의 고백인 신조를 기록한 경문이란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이란 사도들이 고백한 믿음을 기록한 경문이란 사전적인 뜻이겠네요. 그런데 실은 사도들이 직접 고백했다기 보다 사도적인 권위를 가진 교회가 정리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초기 교회의 역사에서 개 교회가 성경을 소유하거나 회람하는 것은 부피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문맹자 비율도 높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 간단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외워서 고백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교회들마다 제 각기 고백되는 신조들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리고 교회에 대한 고백들이 그것이었습니다. 로마의 공식적인 종교로 기독교가 인정된 이후 여러 공의회를 거치면서 신조가 정리되었습니다. 여러 번의 공의회를 통해 생긴 신조들은 공의회의 이름을 붙인 신조로 자리잡게 됩니다. 예를 들면 니케아 신조, 콘스탄티노플 신조, 톨레도 신조 등이 그런 것입니다. 기독교가 서로마의 카톨릭 교회와 동로마의 정교회로 갈리면서 서방교회는 사도신경을, 동방교회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공식적인 신조로 고백해 오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들이 무엇을 믿는지 우리의 신앙을 핵심적으로 정리해 놓은 신앙의 알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이 신앙의 고백을 예배 때마다 활용했고 새신자를 교육하거나 세례 문답으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자 사도신경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봤으니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죠. 사도신경이 예배의 첫머리에 위치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도신경의 별명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라틴어로 사도신경을 심볼룸(Symbolum)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심볼룸은 Password, Token,Ticket등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사도신경은 예배의 문을 여는 비밀번호로서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예배 아니겠습니까? 그 예배의 문을 사도신경이 연다는 것은 사도신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하고 그 의미를 되새김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자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비밀번호를 정확하게 입력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은 우리 신앙의 정확한 주소를 고백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명쾌한 신앙고백을 통해 예배의 문이 열리는 것이고 우리 삶의 문제들이 풀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또 다른 별명은 Credo입니다. 사도신경의 첫 단어가 크레도이기 때문이죠.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둠에 휩싸이고 불의가 판치며 내 인생에 쓰레기 같은 경험들이 쌓여간다 해도, 그래도(Credo)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신앙의 고백이기에 사도신경은 우리 예배와 삶의 열쇠이기에 충분합니다.
재테크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산이나 재물을 뜻하는 재(財)에 Thechnology를 합쳐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가지고 있는 자산이나 재무를 효과적으로 관리 운용하여 최대 이익을 창출해 내는 방법을 일컫는 말이죠. 이 재태크를 이용한 신조어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금(gold)테크가 그 중 하나죠. 돈보다 가치가 있는 금(金)에 투자하여 자산을 불리는 방식을 일컫는 말입니다. 최근에는 금테크의 아류인 근(筋)테크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근은 근육의 줄임말입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은 몸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고, 몸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근육을 늘리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라는 취지에서 ‘근테크’라는 말이 만들어 진 듯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것보다 더 확실한 투자와 이익을 창출하는 방법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목사님이 이런 말씀해도 되냐구요? 한 번 들어보시죠.
우리 삶을 진정으로 부요하게 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재물을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재물로 절대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재물이 갖는 파워를 우리는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재물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게 만드는 성향이 있습니다. 왜냐면 재물(맘몬)이 갖는 신적인 힘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물이 갖는 아이러니는 가지면 가질 수록 허기가 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에릭시톤의 형벌’과도 같습니다. 에릭시톤은 신을 경멸하고 신성하게 여기지 않은 불경죄로 기아의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습니다. 평생 배고픔을 느끼는 ‘허깃증’ 갖고 살아가는 형벌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나중엔 하나뿐인 딸을 팔아 먹을 것을 사고, 자신의 팔다리까지 잘라 먹는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재물이 갖는 파워는 에릭신톤에게 내려진 ‘허깃증’과도 같습니다. 반면 관계는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할뿐 아니라 허기를 잠재웁니다. 우리의 삶을 소유가 아니라 관계에 촛점을 맞춰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룻기 말씀을 통해 ‘헤세드’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헤세드는 언약적인 관계로 묶인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언약적인 신실함과 자비를 일컫는 말입니다. 헤세드를 소유하고 헤세드를 넓혀가는 ‘헤텍’(Hesed Tech)에 우리 삶을 투자를 해야 합니다. 왜냐면 헤세드는 그것을 받는 이 뿐만아니라 주는 이의 삶도 풍성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헤세드를 주는 이의 삶을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헤세드를 행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헤세드로 갚아주십니다. 나오미에게서 시작됐던 헤세드는 룻에게서 행해지고, 룻이 행한 헤세드는 보아스를 통해 행해집니다. 헤세드야 말로 돌고 돌고 돌면서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하는 금덩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멤버십 서비스를 받아 혜택(惠澤)이 쏟아지는 헤텍이야 말로 최고의 재태크라 할 수 있으니, 헤세드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삶은 반드시 부유해질 겁니다.
물질과 소유가 주는 만족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관계가 주는 만족으로 부유한 교회나의 가치와 소중함을 깨달아
다른 이들의 존재를 꽃피워주는 햇살 같은 교회
분열과 다툼으로 평화(샬롬)가 깨어진 세상 속에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치유하는 평화의 교회비틀거리더라도 정의의 길을 걸으며
모든 위선과 불의에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한 교회
부한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의 소리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부르짖음에 경청하며 동행하는 쉼터교회크고 성장하는 교회보다
작더라도 유기적이고 건강한 교회
타고난 기질과 천성이라 핑계대지 않고
습득된 성품으로서 그리스도의 미덕을 추구하는 덕스러운 교회서로의 차이와 다름에 불편해 하기보다
차이와 다름을 통해 아름다워지는 모자이크 교회
일상과 로컬의 소중함을 알아
지역 사회와 함께 동행하며 공생하는 동네 교회
위로 하나님 사랑, 옆으로 성도 사랑,
바깥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균형 잡힌 교회
인간의 편리와 탐욕으로 신음하는 피조세계와 생태계 속에서
온갖 살아 숨쉬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교회 건물 안에 갇히지 않고
향기나는 인격과 성품으로 세상 속에서 열매 맺는 일상 교회멈춤(샤밧)의 소중함과 안식의 가치를 알고
느리더라도 함께 손잡으며 걸어가는 순례자들의 교회
이곳이 마지막 날에나 보게 될 천국인양
하나님 나라를 맛빼기로 보여주는 맛집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