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가족 캠프가 두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한 달여 전에 캠프 장소에서 캠프 장소 사용을 위해서 높은 기준의 보험이 필요하다는 통보를 해 왔습니다. 여러 이유로 그들의 요구 사항을 맞춰주지 못하게 되어 장소 사용이 갑작스레 취소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여러 장소들을 물색하고 알아 보았으나 조건이 맞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부득이하게 숙박을 취소하고 토요일에 모든 일정을 소화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토요일 일정도 세미나 장소와 저녁식사 및 교제 장소를 분리할 수 밖에 없었구요. 그래서 세미나는 교회 유스센터에서 하고 저녁 식사와 교제는 옥스보우 파크로 이동하여 하기로 한 것입니다. 갑작스레 일정이 변경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여름 가족 캠프 주제를 “다시 만나는 교회”로 잡았더니, 수련회 장소도 교회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버렸네요. 물론 평소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리프레쉬 하는 것도 좋겠지만 장소를 떠나 우리의 마음이 하나되고 알찬 내용들이 나눠진다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고 함께 동참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가족 캠프 주제가 왜 “다시 만나는 교회”인지 궁금하시죠? 실은 책 제목입니다. 포항기쁨의 교회를 담임하시는 박영호 목사님의 책인데요, 이 책은 목사님께서 시카고에서 유학하시던 시절 개척하신 약속의 교회에서 새신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드신 교제를 기반으로 쓰신 책이라고 합니다. 교회론적인 관점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신론, 구원론, 선교론 등 다양한 교리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준 책이죠. 무엇보다 교회의 근본적인 부르심인 세상을 향한 선교적 사명을 통해 교회를 이해하려고 시도했던 부분이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인식하고 모든 성도들이 선교적인 존재로 자신을 형성해 가는 것에 촛점을 맞추고 성숙해 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갖고 영생의 소망을 갖는데서 멈추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구원 이후에 우리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교적인 존재는 깨달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을 통한 실천과 행동을 통해 습관화 되고 체질화 시켜 그것이 우리 인격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오랜 기간의 형성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책은 우리가 함께 교회를 통해 선교적인 존재로 어떻게 빚어져 갈지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미리 이 책을 읽어 오셔서 세미나를 통해 심화 학습하고 조를 나누어 조별 토론을 통해 우리의 생각들을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 먹은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가족 캠프도 우리의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변회된 계획 가운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보물을 숨겨두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다시 만나는 교회에서 여러분을 만날 것이 벌써 기대됩니다. 함께 하실래요?
성령강림절을 맞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절기로는 칠칠절입니다. 칠일이 일곱번 지난 절기로서 유월절 후 50일째에 맞는 절기여서 오십을 의미하는 오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무렵 팔레스타인은 이른 무화과와 포도 수확이 한창입니다. 수확의 기쁨을 절기를 통해 함께 누렸습니다.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시간을 감각하며 산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시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여 시간의 성소를 만드는 것이지요. 시간의 성소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시간들을 특별히 구별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시간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하나님께 비끄러매기 위한 시간을 마련하고 이웃을 위한 시간의 여백을 비워 두는 삶이 바로 시간의 성소를 만드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교회 전통에서 지켜지는 절기와 성경에서 유대인들을 통해 행해졌던 절기들을 우리도 감각하며 그 의미들을 알고 되새겨 보는 것은 시간의 성소를 만드는 삶에 있어서 중요한 감각입니다. 유대인들은 절기마다 낭독하는 성경이 따로 있었는데 칠칠절에 룻기를 낭독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년 성령강림절기를 기점으로 룻기 말씀을 함께 톺아보았습니다. 룻기는 헤세드의 사람들이 열어가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다윗의 증조부모인 보아스와 룻이 보여준 헤세드를 통해 그들의 후손 다윗 왕이 열어갈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고 있는 것이죠. 보아스가 보여준 헤세드는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싹쓸이 하지 않는 삶”이야 말로 그가 보여준 가장 감동적인 헤세드였습니다. 나그네와 과부들을 위해 자신의 소유의 일부를 떼어내어 남겨주는 행위는 참으로 아름다워 보입니다.
레위기 19장에서 하나님은 거룩한 삶이 어떤 삶인지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19:2).” 그러면서 거룩한 삶은 이런 삶이라며 구체적인 명령들이 나오는데 보십시오. “밭에서 난 고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된다. 거두어 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 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레19:9-10). 이웃을 위한 배려의 공간을 마련하는 삶이 거룩한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싹쓸이 하지 않는 삶입니다. 싹쓸이라는 말은 참으로 음습합니다. 나만 배부르면 되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사탄의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이라면 그런 삶을 살면 안된다고 타이르고 있습니다. 우리 수입의 일부가 가난한 사람들의 몫임을 알고 그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거룩한 삶입니다. 오순절을 통해 태어난 초대교회는 싹쓸이하지 않고 나누는 공동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예시합니다. 이웃을 위한 여백과 환대의 공간을 만드는 이들을 통해 거룩한 삶은 현실이 되어 갑니다.
5월 둘째 주일이 어머니의 날이라지요? 모든 어머니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축하를 드립니다. 그동안 정말로 애 쓰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느 시인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데,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하지요. 어찌 하나님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겠습니까마는, 하나님은 어머니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 말의 고갱이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헌신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아직까지 어머니의 사랑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네요. 그분 앞에서는 항상 막내이고 어린 아이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어머니의 사랑이 차지하는 지분이 꽤 커보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어머니 같은 하나님, 아버지 같은 하나님이라면 절대 안 믿겠다고 합니다. 부모의 뒤틀린 사랑을 받거나 학대를 받은 이 이들에게는 부모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맨날 때리고 욕하고 술주정하는 아버지와 같다고 기겁하며 믿기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어떤 부모이냐에 따라 자녀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가 결정된다니 이것 참 그냥 막 살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부터 “하나님의 형상”은 선포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고대 근동의 다양한 창조 설화의 대항적인 선포였습니다. 바벨론의 창조설화인 <에누마 엘리시>, 가장 오래된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 등은 신들의 세계를 그립니다. 신들간의 전쟁과 투쟁의 복제품으로 인간의 세계를 묘사합니다. 이런 신화들 속에서 인간은 신들을 섬기는 존제에 불과합니다. 이런 신화가 탄생한 이유는 지배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입니다. 바벨론의 왕은 신적인 존재이고 신분 질서는 신들이 정한 것이기에 바꿀 수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죠. 사람들 속에 체념이라는 병균을 집어 넣고 숙명론을 조장하는 기능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에 대항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가히 혁명적인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왕이라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인권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분의 형상이라고 말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나를 보며 하나님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죠.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실 수 있는 분이지만 자신을 제한하고 그분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직장동료로서 이웃으로서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현존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의 사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윤리의 실천적 토대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옆 빈 밭에 드디어 농부들의 손길이 닿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 밭에 씨를 뿌리기 위해 밭갈이를 했나봅니다. 지지난 해에는 옥수수가 심겨졌고 작년에는 콩이었는데 올해는 어떤 씨가 심겨질 지 기대가 됩니다. 한국의 5월도 씨뿌리기에 한창인 계절이지요. 특히 모내기가 이때 이뤄지니 1년 중 가장 중요한 계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스피노자는 사과 씨를 보며 사과 열매를 미리 보았다고 하지요. 지금 뿌리는 씨앗이 무엇이든 뿌리는 이는 반드시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런데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수많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맹자의 공손추(公孫丑)에 어리석은 송나라 농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농부는 모내기를 한 이후에 벼가 어느 정도 자랐는지 궁금하여 논에 가봅니다. 자신의 논의 벼들이 다른 사람들의 벼보다 덜 자라보였습니다. 농부는 궁리 끝에 벼의 순을 짭아 빼보니 더 자라 보였습니다. 다음 날 논에 가보니 벼가 다 말라 있었다는 어리석은 농부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유래된 사자 성어가 발묘조장(拔苗助長)입니다. 조장한다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급한 나머지 서두르다 일을 그르친다는 뜻입니다. 씨를 뿌린 자의 미덕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번 주일은 때마침 5월 5일 어린이 날이네요. 미국에서는 의미 없는 날이지만 한국에서는 어린이들이 가장 기다리는 날 중 한 날이지요. 어린이들을 자라나는 새싹에 비유하곤 하는데, 5월의 푸르름이야 말로 아이들과 참 잘 어울립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을 농사에 비하기도 합니다. 고된 농사일처럼 자녀들 키우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열매 맺는 지난한 과정을 생각하며 한 말 같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더디게 성장합니다. 그런데 우리 어른들의 기대와 바람은 그들을 기다려 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남보다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먹고 사는 일에 대한 불암감으로 우리는 아이들을 자꾸 세상이 정해 놓은 틀 속에 가둬두려고 합니다. 어리석은 농부처럼 아이들에게 억지를 부려 당장의 열매를 보기를 원합니다. 아이들이 숨막혀 하는 이유는 우리가 만들어 둔 틀 속에 그들이 갇혀 있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더디더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불안하더라도 아이들을 믿고 인내해야 합니다. 무한 경쟁에 내 몰린 우리 아이들에게 말씀의 씨앗이 잘 자랄까 걱정되고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대도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뿌린 씨앗이 좋은 씨앗이라면 반드시 열매 맺게 되어 있으니까요. 우리는 심고 물 주지만 자라게 하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울더라도 씨를 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뿌린 씨가 자라지 안을 때 덧 뿌리는 씨를 ‘움씨’라고 하지요. 가뭄에 씨앗들이 타 죽어갈 때, 어머니와 함께 밭에 가서 움씨를 뿌리고 물을 길어다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기독교 교육은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것입니다. 조급해 하지 말고 아이들을 위해 지금이라도 움씨를 뿌려야지 않을까요?
가끔 질문을 받습니다. “목장이 뭐예요?”, “목장모임은 왜 하는 거예요?” 우리는 왜 목장 모임을 하는 것일까요?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이야 말로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주기적으로 행해지는 목장 모임의 목적이 무엇이고 왜 모이는 지 알고 모이는 것이 정말 중요할 것 같습니다. 제임스 스미스라는 신학자는 교회를 “심장이식재활센터”라는 은유로 설명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던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심장으로 이식되어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심장을 이식 받은 환자는 수술로 치료가 끝나지 않습니다. 재활 치료가 이어집니다. 정기적으로 의사를 만나서 상태를 점검 받고 주기적인 운동과 식단 조절을 해야만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니 끝이 아닙니다. 그 다음부터가 중요합니다. 더욱 건강하고 바른 삶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건강한 삶이란 건강한 인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름아닌 예수의 인격과 성품을 덧입기 위해 노력하는 삶입니다. 구원 이후의 삶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품, 다른 말로 덕이 내 성품과 인격 안에 자라가도록 노력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덕을 함양하는 삶 또는 성화의 과정은 많은 노력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과 실천은 혼자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만드셨죠. 교회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재활센터입니다. 교회 안에는 주기적인 실천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 성찬, 세례, 소그룹, 식탁교제 등이 그것이죠. 이런 것을 주기적으로 실천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의 문법을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보여주고 살아내는 곳입니다. 교회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갖추어야 할 덕을 훈련하고 하나님 나라의 분위기를 익혀갑니다. 소그룹은 그것을 더욱 심화시키고 활성화시키는 곳입니다. 소그룹 식사는 단순한 교제 이상입니다. 식사를 통해 우리는 환대의 문법을 배우고 연습합니다. 말씀 나눔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기회를 갖습니다. 성찰 없이 성숙하고 덕을 덧입기는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를 비춰보는 것입니다. 말씀 나눔을 통해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실천해 보기도 합니다. 서로의 실천과 나눔을 통해 우리는 자극을 받고 함께 성장해 가게 됩니다. 단순한 적용점을 찾아 실천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성찰의 도구로서 나의 삶의 지향을 조정하는 시간이라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날까지 함께 구원을 이뤄가는 공동체입니다. 건강을 위해 운동과 식단을 조절하듯, 교회와 소그룹을 통해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연습하며 빚어져 가게 됩니다. 주기적인 교제와 실천을 통해 삶의 문법과 삶의 지향점이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게 조정되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자기수여의 문법이 나에게 체화될 때까지 끊임 없이 연습하고 훈련해 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그룹은 나를 아름다운 그릇으로 빚어가는 공방 아닐까요?
지난 한 주 날씨가 변화무쌍했지요? 주초에 봄비가 연두빛깔 아우성으로 잠자는 생명을 깨우듯 힘 있게 내렸습니다. 농사꾼의 자녀들이 비를 반기는 이유가 비가 오면 그날은 농사일을 쉬기 때문이라는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비가 오면 설렙니다. 이슬비로는 일을 쉬지 않으니 주럭주럭 힘 있게 내리는 비여야만 반갑습니다. 주말로 가면서 점점 날씨도 추워지고 바람이 거세집니다. 안락하고 따뜻함에 익숙한 비루한 몸이라 그런지 바람을 맞으며 우뚝 서서 걸을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바람부는 날엔 좋아하는 산책도 멈추고 아직은 앙상한 흔들리는 가지들만 창밖으로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다채로운 봄날씨 앞에서 이것이 우리네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네 인생이야 말로 명과 암이 공존하고, 바람은 언제 불어 닥칠지 알 수 없고, 궂은 날과 맑은 날이 대중 없이 교차합니다. 인생이 일기예보 정도만큼이라도 한 치 앞을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고요한 일상에 갑자기 불어 닥치는 풍파에 정신을 못차리고 나가 떨어지곤 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변화는 우리를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통로가 되어주는 것은 아닐까요? 겨울에서 봄으로 옮겨 가려고 만물이 요동하며 몸부림 치듯, 우리 삶에 불어 오는 변화와 풍파들은 우리 삶에 시작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일기예보는 아닐까요. 어떤 이는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이곳의 삶의 특성상 떠나는 이들이 낯설지 않고 보내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새가 부화하려면 알을 깨고 나와야 하듯이 익숙한 것을 깨고 새로운 환경 가운데로 옮겨 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더 큰 세계를 향한 도약이 될 수 있습니다. 나그네 삶을 즐기는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이민자로서 나그네 삶에 경제적인 어려움 보다도 더 큰 것은 정서적 긴장감일 것입니다. 지속적인 긴장 속에 머물 때 마음속 여백은 줄어들고 삶은 여유를 잃게 됩니다. 여백과 여유를 잃은 삶은 날카로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말은 퉁명스러워지고 표정 또한 어둡고 싸늘해 지기 쉽습니다. 원망이 커지고 분노심을 주체할 수 없어지기까지 합니다. 그럴 수록 더 큰 세계를 향해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몸의 자세를 바꾸면 생각이 바뀐다고들 합니다. 여행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굳이 돈들고 집떠나 고생하는 것이지만 자세를 바꾸고 시선을 바꾸기 위해 여행만큼 좋은 것도 없습니다. 산책은 여행을 대체할 다음 처방전입니다. 농사 짓던 시절 포대에 곡식을 담을 때 곡식의 빈틈을 매꿔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하려고 포대를 들었다 놨다 반복하며 추겨 세우곤 하죠. 산책이 마치 그 동작을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걷기를 반복하다 보면 긴장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해소됨을 느낍니다. 계절의 변화와 인생의 변화 앞에서 초라해지는 우리지만, 그 변화 속에서 우리네 삶에 일어날 긍정적인 가능성들을 상상해 봅니다. 다채롭고 버라이티한 우리네 삶이지만 그 안에서 여백을 찾고 여유를 찾아 따뜻하고 부드럽게 타자들을 보듬어 주는 삶이길 바라봅니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MBTI 성격 유형에서 N(직관)이 발달한 저로서는 공식을 이해하고 대입하고 적용하는 수학이라는 과목이 다른 나라 말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공식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는 듯합니다. 최근에 어떤 목사님께서 H=C/D 라는 공식을 말씀하시더군요. ‘이게 뭐지? 아 또 공식인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H-Happiness, C-Capital, D-Desire 라는 힌트를 드리면 좀 감이 오시나요? 행복은 욕망 분의 자산이라는 공식입니다. 자산(C) 안에는 돈, 재산, 소유 등의 유형의 자산도 있지만 인맥과 같은 무형의 자산도 포함된다고 합니다. 예전에 비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편리해 졌고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는 사회관계망(SNS)이라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시스템 덕에 더욱 편리해지고 접근이 쉬워졌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고 하소연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행복을 갉아 먹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분모인 욕망(Desire)이 자산의 증가 보다 훨씬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소유와 소비가 증가한 만큼 우리들의 욕망은 배가 되었습니다. 아니 소유와 소비를 따르는 세상 풍조에 휩쓸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더 큰 욕망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예전에 못 살던 시절보다 훨씬 행복하지 않고 관계의 결핍을 호소할 뿐만 아니라 외로움과 우울에 시달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행복의 비결은 욕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욕망의 값을 조절하려는 것보다 아예 욕망의 방향을 바꿔버리는 것이죠. 모두가 경쟁을 통해 자산을 확보할 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여 행복을 찾고자 하는 욕망을 따르지 않고 아예 다른 욕망을 따르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경쟁과 배제, 혐오를 통해 다른 이를 도태시켜 누리는 행복이 아니라, 포용하고 상생하고 연대하며 환대를 통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우리 주님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내 자신의 필요와 내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Ego를 향했던 욕망의 방향을 나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인 타자를 향해 수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이 욕망을 재조정하는 과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생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천국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마음의 다짐과 함께 시작됩니다. 천국의 삶이란 타자를 위해 나를 선물로 주는 자기 수여의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를 주로 믿고 그가 몸소 보이신 삶을 따라가겠다고 결단한 이후부터 우리의 욕망은 조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욕망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욕망하는 방향의 전환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교회 생활과 소그룹은 바로 이 욕망 재조정의 훈련소라 할 수 있습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있지만, 다른 이와 함께 함으로 더 행복하다는 것을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환대와 연대, 포용과 공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음을 함께 배워가는 것입니다. 행복의 비결은 욕망의 방향을 조정하는 길이 아마 제일 빠를 걸요?
그날 삭풍에 느즈막이 피어난 매화꽃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셋째 아들의 출산을 단 며칠 남겨두고 제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매화꽃 마냥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2016년 2월 말에 귀 밑 이하선이라는 침샘에 나있는 종양을 떼내는 수술을 했습니다. 안면 신경을 감싸고 있던 종양을 떼내는 수술은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주치의 선생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지만 떼어낸 종양의 조직이 악성으로 판명났습니다. 부랴부랴 악성 세포들이 몸에 퍼졌는지 검사를 해야했고 그 검사를 기다리는 1주일의 기다리는 시간에 집주변을 산책하며 흔들리는 매화와 마주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별다른 이상이 없어서 수술과 함께 치료를 종료한다는 소식과 함께 기쁨과 환희의 부활절을 맞이했었죠. 그때만큼 감격적인 부활절도 없었습니다. 3월 27일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고 난 후 나흘만에 막내 녀석이 태어났으니 이 녀석은 그야말로 부활둥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막내의 출산이 없었더라면 한국에 나와 검사와 치료도 받을 수 없었을 것이고 중국에서 계속 병을 키우고 있었을테니 녀석이야 말로 저를 부활시켜준 부활둥이였습니다. 흔들리는 매화 앞에서 저를 찾아와 주셨던 주님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부활의 주님은 흔들리는 우리네 삶에 다가와 주시곤 합니다.
흔들리던 제자들에게 다가 오셨던 부활의 예수님은 참 따뜻했습니다. 주님은 부활 후 제자들을 찾을 때마다 먹을 것을 준비하시곤 하셨죠. 주님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묻곤하셧죠. 요즘 말로 치면 “밥은 먹고 다니니?”일 것입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하며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던 수제자 베드로는 주님을 볼 면목이 없었을텐데, 그에게 주님은 “얼굴이 그게 뭐니?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녀야지. 이리와~ 생선 궈놨으니 한 술 들자!” 하셨죠. 또 한 번은 부활의 주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찾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달려서 세 시간 동안 몸부림 치던 것을 직접 보았죠.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냐고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어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던 예수를 보며 그들은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죽음이 최후의 판결자라고 확신하고 낙향하기로 한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에 온통 사로잡혀 있던 그들을 주님은 친히 찾아가시어 그들과 저녁 식탁을 함께 해 주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보여주신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바로 ‘환대’였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주님은 흔들리는 자기 백성들을 기꺼이 찾아가십니다. 이직, 결혼, 출산, 건강, 경제적인 고통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을 그냥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찾아가시어 기어코 다시 일어날 힘을 주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들은 모두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이 판 치는 세상 한 가운데로 보내진 자들이지만, 죽음에 맞서 싸우는 동아리인 교회의 일원입니다. 때론 흔들릴 지언정 아주 엎드러지지 않음은 부활의 주님과 형제 자매들이 우리를 따뜻하게 환대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날 삭풍에 느즈막이 피어난 매화꽃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셋째 아들의 출산을 단 며칠 남겨두고 제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매화꽃 마냥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2016년 2월 말에 귀 밑 이하선이라는 침샘에 나있는 종양을 떼내는 수술을 했습니다. 안면 신경을 감싸고 있던 종양을 떼내는 수술은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주치의 선생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지만 떼어낸 종양의 조직이 악성으로 판명났습니다. 부랴부랴 악성 세포들이 몸에 퍼졌는지 검사를 해야했고 그 검사를 기다리는 1주일의 기다리는 시간에 집주변을 산책하며 흔들리는 매화와 마주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별다른 이상이 없어서 수술과 함께 치료를 종료한다는 소식과 함께 기쁨과 환희의 부활절을 맞이했었죠. 그때만큼 감격적인 부활절도 없었습니다. 3월 27일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고 난 후 나흘만에 막내 녀석이 태어났으니 이 녀석은 그야말로 부활둥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막내의 출산이 없었더라면 한국에 나와 검사와 치료도 받을 수 없었을 것이고 중국에서 계속 병을 키우고 있었을테니 녀석이야 말로 저를 부활시켜준 부활둥이였습니다. 흔들리는 매화 앞에서 저를 찾아와 주셨던 주님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부활의 주님은 흔들리는 우리네 삶에 다가와 주시곤 합니다.
흔들리던 제자들에게 다가 오셨던 부활의 예수님은 참 따뜻했습니다. 주님은 부활 후 제자들을 찾을 때마다 먹을 것을 준비하시곤 하셨죠. 주님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묻곤하셧죠. 요즘 말로 치면 “밥은 먹고 다니니?”일 것입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하며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던 수제자 베드로는 주님을 볼 면목이 없었을텐데, 그에게 주님은 “얼굴이 그게 뭐니?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녀야지. 이리와~ 생선 궈놨으니 한 술 들자!” 하셨죠. 또 한 번은 부활의 주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찾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달려서 세 시간 동안 몸부림 치던 것을 직접 보았죠.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냐고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어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던 예수를 보며 그들은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죽음이 최후의 판결자라고 확신하고 낙향하기로 한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에 온통 사로잡혀 있던 그들을 주님은 친히 찾아가시어 그들과 저녁 식탁을 함께 해 주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보여주신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바로 ‘환대’였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주님은 흔들리는 자기 백성들을 기꺼이 찾아가십니다. 이직, 결혼, 출산, 건강, 경제적인 고통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을 그냥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찾아가시어 기어코 다시 일어날 힘을 주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들은 모두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이 판 치는 세상 한 가운데로 보내진 자들이지만, 죽음에 맞서 싸우는 동아리인 교회의 일원입니다. 때론 흔들릴 지언정 아주 엎드러지지 않음은 부활의 주님과 형제 자매들이 우리를 따뜻하게 환대해주기 때문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도둑입니다. 그는 아테나이로 들어가는 관문에서 지키고 서 있다 나그네가 지나가면 그를 데리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침대에 눞여 죽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침대보다 나그네가 크면 잘라서 죽이고, 작으면 늘여서 죽였습니다. 그는 차이를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틀에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고 집어 넣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지금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빗대곤 합니다. 사람은 사이 존재라고들 합니다. 인간이 사이 존재라는 것은 인간(人間)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 사이를 나타내는 말이기도하지만, 인간의 현존을 나타내는 두 개념인 시간(時間)과 공간(空間) 또한 사이라는 말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를 살아가며, 하늘과 땅 사이의 이곳에 살아갑니다. 사이 존재인 인간은 ‘차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홀로 떨어져 살아갈 수 없고, 나와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우러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폭력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가두는 격입니다. 자기와 다른 것은 모두 불온한 것이며 잘라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누구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하나씩 지니고 살아갑니다. 나의 생각, 나의 경험, 나의 견해, 나의 취향을 절대화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재단하려 나섭니다. 부먹이 옳으니 찍먹이 옳으니 하며 내가 선호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따라야 한다고 우기기도 합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 계명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리, 그러니까 ‘기준’이 되는 절대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기준이 되는 순간 우리는 ‘절대’라는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뜻에 따라 다른 이를 지배하고 조정하려는 악마의 일의(一意)적인 욕구에 대한 사랑의 저항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의 절대 권력을 내려 놓고 다른 이를 위해 나무 틀에 자기를 못박는 것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반대 극점에 십자가가 놓여 있는 것이지요. 고난 주간이 이제 시작됩니다. 고난 주간은 예수의 십자가를 지는 흉내라도 내보겠다고 주님을 따라가보는 절기입니다. 1년에 한 주라도 십자가 지는 삶을 따라보겠다고 작정하는 기간이지요. 우리는 모두 자기애의 중력이 우리를 잡아 끄는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고난 주간 만큼은 우리가 그 징글징글한 자기애의 중력을 자기 부정의 날선 검으로 잘라내기 위해 몸부림 쳐 보는 기간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부탁하신 주님은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신 삶의 결과 하늘로 들어 올리시게 됩니다. 자기애의 Gravity에서 해방되어 주님의 Grace가 나를 자유케하는 부력을 맛보는 것은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도둑입니다. 그는 아테나이로 들어가는 관문에서 지키고 서 있다 나그네가 지나가면 그를 데리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침대에 눞여 죽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침대보다 나그네가 크면 잘라서 죽이고, 작으면 늘여서 죽였습니다. 그는 차이를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틀에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고 집어 넣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지금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빗대곤 합니다. 사람은 사이 존재라고들 합니다. 인간이 사이 존재라는 것은 인간(人間)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 사이를 나타내는 말이기도하지만, 인간의 현존을 나타내는 두 개념인 시간(時間)과 공간(空間) 또한 사이라는 말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를 살아가며, 하늘과 땅 사이의 이곳에 살아갑니다. 사이 존재인 인간은 ‘차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홀로 떨어져 살아갈 수 없고, 나와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우러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폭력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가두는 격입니다. 자기와 다른 것은 모두 불온한 것이며 잘라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누구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하나씩 지니고 살아갑니다. 나의 생각, 나의 경험, 나의 견해, 나의 취향을 절대화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재단하려 나섭니다. 부먹이 옳으니 찍먹이 옳으니 하며 내가 선호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따라야 한다고 우기기도 합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 계명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리, 그러니까 ‘기준’이 되는 절대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기준이 되는 순간 우리는 ‘절대’라는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뜻에 따라 다른 이를 지배하고 조정하려는 악마의 일의(一意)적인 욕구에 대한 사랑의 저항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의 절대 권력을 내려 놓고 다른 이를 위해 나무 틀에 자기를 못박는 것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반대 극점에 십자가가 놓여 있는 것이지요. 고난 주간이 이제 시작됩니다. 고난 주간은 예수의 십자가를 지는 흉내라도 내보겠다고 주님을 따라가보는 절기입니다. 1년에 한 주라도 십자가 지는 삶을 따라보겠다고 작정하는 기간이지요. 우리는 모두 자기애의 중력이 우리를 잡아 끄는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고난 주간 만큼은 우리가 그 징글징글한 자기애의 중력을 자기 부정의 날선 검으로 잘라내기 위해 몸부림 쳐 보는 기간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부탁하신 주님은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신 삶의 결과 하늘로 들어 올리시게 됩니다. 자기애의 Gravity에서 해방되어 주님의 Grace가 나를 자유케하는 부력을 맛보는 것은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는 어떤 의미인가요? 교회가 여러분 각자의 삶에 주는 의미는 모두가 다 다르리라 생각됩니다. 어린 시절 저에게 교회는 놀이터였습니다. 집과 바로 이웃한 교회는 널직한 마당이 있었고 또한 그곳에는 넉넉하고 너른 마음의 목사님과 사모님이 계셨죠. 그분들은 항상 저를 환영해 주셨습니다. 집에서는 먹어보지 못한 간식들을 대접해 주시기도 했죠. 예배당 안의 의자들 밑에 숨어 숨바꼭질을 하기도 하고 교회의 큰 기둥을 이용해 나이먹기라는 놀이도 했습니다. 겨울에는 목사님께서 예배당의 난로에 불을 지펴주시면 옹기 종기 모여 앉아 그 따스함을 즐기곤 했죠. 겨울 난로만큼 교회는 따뜻한 곳이었습니다. 청년이 되어 교회 어른들과 함께 중국 감숙성의 산골 오지 소수민족을 돕는 의료선교에 동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선교를 마치며 감숙성 란저우라는 도시의 한 호텔에서 모두 함께 가족의 시간이라는 공동체의 나눔을 가졌습니다. 벅찬 선교의 현장을 떠나야 하는 아쉬움과 이곳에 계속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필요성에 선교사를 한 명 파송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견이 즐거운 분위기에서 나왔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제가 이듬해에 교회의 파송을 받아 평신도 선교사로 그땅을 다시 밟게 되었죠. 그들은 검증되지 않은 한 명의 대학생을 신뢰하여 보내는 대담함을 보였습니다. 교회가 한 명의 선교사를 잉태하고 그를 낳아 선교지에 보내본 경험은 의료선교에 동참했던 모두가 느끼는 감격이었습니다. 제 지난 삶을 돌아보니 교회는 그야 말로 저에게 어머니의 품이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태어났고 교회가 저를 길렀으며 저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의 순교자였던 키프리아누스는 여성의 출산과 양육 이미지를 통해 교회를 어머니로 소개했습니다. 그의 글을 간단히 인용해 봅니다. “교회의 자궁으로부터 우리는 태어났고, 교회의 젖을 먹고 양육되며, 교회의 숨결을 호흡하며 소생한다.…만일 당신이 교회를 당신의 어머니로 가지지 못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어머니만큼 이타적인 존재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요? 어머니는 사람이 자기를 타자에게 선물로 줌을 통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상입니다. 건강한 교회에 몸담은 사람들은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 자란 아이들과도 같습니다.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존재로 자라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은 불신자라도 건강한 교회에 매주일 참석하다보면 그는 교회의 품속에서 거듭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그 널직한 교회의 품에서 놀다 어느새 목사까지 된 사람입니다. 그 품이 너무 따뜻했습니다. 교회를 통해 만난 선교의 동역자들은 평생지기로 지내는 제 2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제가 평생 교회에 몸담고 성도들을 섬기는 이유는 어머니된 교회의 품을 더 많은 이들에게 맛보게 해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는 어떤 의미인가요? 교회가 여러분 각자의 삶에 주는 의미는 모두가 다 다르리라 생각됩니다. 어린 시절 저에게 교회는 놀이터였습니다. 집과 바로 이웃한 교회는 널직한 마당이 있었고 또한 그곳에는 넉넉하고 너른 마음의 목사님과 사모님이 계셨죠. 그분들은 항상 저를 환영해 주셨습니다. 집에서는 먹어보지 못한 간식들을 대접해 주시기도 했죠. 예배당 안의 의자들 밑에 숨어 숨바꼭질을 하기도 하고 교회의 큰 기둥을 이용해 나이먹기라는 놀이도 했습니다. 겨울에는 목사님께서 예배당의 난로에 불을 지펴주시면 옹기 종기 모여 앉아 그 따스함을 즐기곤 했죠. 겨울 난로만큼 교회는 따뜻한 곳이었습니다. 청년이 되어 교회 어른들과 함께 중국 감숙성의 산골 오지 소수민족을 돕는 의료선교에 동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선교를 마치며 감숙성 란저우라는 도시의 한 호텔에서 모두 함께 가족의 시간이라는 공동체의 나눔을 가졌습니다. 벅찬 선교의 현장을 떠나야 하는 아쉬움과 이곳에 계속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필요성에 선교사를 한 명 파송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견이 즐거운 분위기에서 나왔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제가 이듬해에 교회의 파송을 받아 평신도 선교사로 그땅을 다시 밟게 되었죠. 그들은 검증되지 않은 한 명의 대학생을 신뢰하여 보내는 대담함을 보였습니다. 교회가 한 명의 선교사를 잉태하고 그를 낳아 선교지에 보내본 경험은 의료선교에 동참했던 모두가 느끼는 감격이었습니다. 제 지난 삶을 돌아보니 교회는 그야 말로 저에게 어머니의 품이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태어났고 교회가 저를 길렀으며 저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의 순교자였던 키프리아누스는 여성의 출산과 양육 이미지를 통해 교회를 어머니로 소개했습니다. 그의 글을 간단히 인용해 봅니다. “교회의 자궁으로부터 우리는 태어났고, 교회의 젖을 먹고 양육되며, 교회의 숨결을 호흡하며 소생한다.…만일 당신이 교회를 당신의 어머니로 가지지 못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어머니만큼 이타적인 존재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요? 어머니는 사람이 자기를 타자에게 선물로 줌을 통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상입니다. 건강한 교회에 몸담은 사람들은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 자란 아이들과도 같습니다.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존재로 자라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은 불신자라도 건강한 교회에 매주일 참석하다보면 그는 교회의 품속에서 거듭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그 널직한 교회의 품에서 놀다 어느새 목사까지 된 사람입니다. 그 품이 너무 따뜻했습니다. 교회를 통해 만난 선교의 동역자들은 평생지기로 지내는 제 2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제가 평생 교회에 몸담고 성도들을 섬기는 이유는 어머니된 교회의 품을 더 많은 이들에게 맛보게 해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 공부가 두번째 강의까지 마쳤습니다. 사도신경은 무엇인가요? 사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를 의미하는 것이고, 신경이란 믿음의 고백인 신조를 기록한 경문이란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이란 사도들이 고백한 믿음을 기록한 경문이란 사전적인 뜻이겠네요. 그런데 실은 사도들이 직접 고백했다기 보다 사도적인 권위를 가진 교회가 정리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초기 교회의 역사에서 개 교회가 성경을 소유하거나 회람하는 것은 부피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문맹자 비율도 높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 간단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외워서 고백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교회들마다 제 각기 고백되는 신조들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리고 교회에 대한 고백들이 그것이었습니다. 로마의 공식적인 종교로 기독교가 인정된 이후 여러 공의회를 거치면서 신조가 정리되었습니다. 여러 번의 공의회를 통해 생긴 신조들은 공의회의 이름을 붙인 신조로 자리잡게 됩니다. 예를 들면 니케아 신조, 콘스탄티노플 신조, 톨레도 신조 등이 그런 것입니다. 기독교가 서로마의 카톨릭 교회와 동로마의 정교회로 갈리면서 서방교회는 사도신경을, 동방교회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공식적인 신조로 고백해 오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들이 무엇을 믿는지 우리의 신앙을 핵심적으로 정리해 놓은 신앙의 알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이 신앙의 고백을 예배 때마다 활용했고 새신자를 교육하거나 세례 문답으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자 사도신경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봤으니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죠. 사도신경이 예배의 첫머리에 위치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도신경의 별명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라틴어로 사도신경을 심볼룸(Symbolum)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심볼룸은 Password, Token,Ticket등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사도신경은 예배의 문을 여는 비밀번호로서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예배 아니겠습니까? 그 예배의 문을 사도신경이 연다는 것은 사도신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하고 그 의미를 되새김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자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비밀번호를 정확하게 입력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은 우리 신앙의 정확한 주소를 고백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명쾌한 신앙고백을 통해 예배의 문이 열리는 것이고 우리 삶의 문제들이 풀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또 다른 별명은 Credo입니다. 사도신경의 첫 단어가 크레도이기 때문이죠.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둠에 휩싸이고 불의가 판치며 내 인생에 쓰레기 같은 경험들이 쌓여간다 해도, 그래도(Credo)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신앙의 고백이기에 사도신경은 우리 예배와 삶의 열쇠이기에 충분합니다.
재테크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산이나 재물을 뜻하는 재(財)에 Thechnology를 합쳐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가지고 있는 자산이나 재무를 효과적으로 관리 운용하여 최대 이익을 창출해 내는 방법을 일컫는 말이죠. 이 재태크를 이용한 신조어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금(gold)테크가 그 중 하나죠. 돈보다 가치가 있는 금(金)에 투자하여 자산을 불리는 방식을 일컫는 말입니다. 최근에는 금테크의 아류인 근(筋)테크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근은 근육의 줄임말입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은 몸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고, 몸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근육을 늘리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라는 취지에서 ‘근테크’라는 말이 만들어 진 듯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것보다 더 확실한 투자와 이익을 창출하는 방법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목사님이 이런 말씀해도 되냐구요? 한 번 들어보시죠.
우리 삶을 진정으로 부요하게 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재물을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재물로 절대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재물이 갖는 파워를 우리는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재물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게 만드는 성향이 있습니다. 왜냐면 재물(맘몬)이 갖는 신적인 힘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물이 갖는 아이러니는 가지면 가질 수록 허기가 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에릭시톤의 형벌’과도 같습니다. 에릭시톤은 신을 경멸하고 신성하게 여기지 않은 불경죄로 기아의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습니다. 평생 배고픔을 느끼는 ‘허깃증’ 갖고 살아가는 형벌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나중엔 하나뿐인 딸을 팔아 먹을 것을 사고, 자신의 팔다리까지 잘라 먹는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재물이 갖는 파워는 에릭신톤에게 내려진 ‘허깃증’과도 같습니다. 반면 관계는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할뿐 아니라 허기를 잠재웁니다. 우리의 삶을 소유가 아니라 관계에 촛점을 맞춰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룻기 말씀을 통해 ‘헤세드’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헤세드는 언약적인 관계로 묶인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언약적인 신실함과 자비를 일컫는 말입니다. 헤세드를 소유하고 헤세드를 넓혀가는 ‘헤텍’(Hesed Tech)에 우리 삶을 투자를 해야 합니다. 왜냐면 헤세드는 그것을 받는 이 뿐만아니라 주는 이의 삶도 풍성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헤세드를 주는 이의 삶을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헤세드를 행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헤세드로 갚아주십니다. 나오미에게서 시작됐던 헤세드는 룻에게서 행해지고, 룻이 행한 헤세드는 보아스를 통해 행해집니다. 헤세드야 말로 돌고 돌고 돌면서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하는 금덩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멤버십 서비스를 받아 혜택(惠澤)이 쏟아지는 헤텍이야 말로 최고의 재태크라 할 수 있으니, 헤세드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삶은 반드시 부유해질 겁니다.
물질과 소유가 주는 만족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관계가 주는 만족으로 부유한 교회나의 가치와 소중함을 깨달아
다른 이들의 존재를 꽃피워주는 햇살 같은 교회
분열과 다툼으로 평화(샬롬)가 깨어진 세상 속에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치유하는 평화의 교회비틀거리더라도 정의의 길을 걸으며
모든 위선과 불의에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한 교회
부한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의 소리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부르짖음에 경청하며 동행하는 쉼터교회크고 성장하는 교회보다
작더라도 유기적이고 건강한 교회
타고난 기질과 천성이라 핑계대지 않고
습득된 성품으로서 그리스도의 미덕을 추구하는 덕스러운 교회서로의 차이와 다름에 불편해 하기보다
차이와 다름을 통해 아름다워지는 모자이크 교회
일상과 로컬의 소중함을 알아
지역 사회와 함께 동행하며 공생하는 동네 교회
위로 하나님 사랑, 옆으로 성도 사랑,
바깥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균형 잡힌 교회
인간의 편리와 탐욕으로 신음하는 피조세계와 생태계 속에서
온갖 살아 숨쉬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교회 건물 안에 갇히지 않고
향기나는 인격과 성품으로 세상 속에서 열매 맺는 일상 교회멈춤(샤밧)의 소중함과 안식의 가치를 알고
느리더라도 함께 손잡으며 걸어가는 순례자들의 교회
이곳이 마지막 날에나 보게 될 천국인양
하나님 나라를 맛빼기로 보여주는 맛집 교회